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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믿음(마가복음14:55-72)
고영수 2020-07-11 추천 1 댓글 0 조회 457
[성경본문] 마가복음14:55-72 개역개정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6)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베드로의 믿음(마가복음14:55-72/2020.7.12.오전)


1. 일본은 2차 대전 중에 크리스천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유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정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예수 믿겠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유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유익한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믿겠다고 하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이름뿐인 껍데기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덕 본다고 하면, 너도 나도 믿는다고 하면서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일본사람들은 아사마시이(浅ましい) 라고 표현했는데, 그 뜻은 찾아보니, 비열하다, 한심스럽다, 치사하다, 비참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의 뜻을 알고 보니 입에 담기가 민망한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이렇게 변하는 이유는 신앙심 보다는 자기 생명과 삶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충성된 베드로는 죽는 일이 있어도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지만, 가롯 유다를 제외하고는 제일 먼저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 법정이나 증인 신문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54, 66절을 보면, 대제사장의 집 안뜰, 혹은 아래 뜰에서 다른 종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고, 베드로는 그곳에서 대제사장의 어린 여종 한 사람으로부터 너도 예수와 같이 다니던 사람이라고 지적을 받자 황급하게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집요하게 추궁하는 어린 여종과 또 다른 종의 추궁에 마침내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그와 자신은 전연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불을 쐬면서 서로 인사말이나 농담을 주고받을 만한, 별 볼일 없는 그런 자리에서 베드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폭탄선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2. 사람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내일이 되면 우리에게 어떤 문제와 시련이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부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핑계로 기독교 신앙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10일 오후6시부터 한국 정부는 우한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이유로, 모든 교회에서 공식적이고 정기적인 예배 이외에, 수련회나 부흥회 등, 기도회나 소그룹 모임이나, 식사는 물론이고 성가대 연습까지 포함해서 각종 행사를 전면 금지한다고 선포하였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벌금 300만원을 물리는 등, 여러 가지의 행정조치를 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외에도 정부가 내어놓은 교회 방역 수칙에 보면, 큰 소리로 말하거나 찬송하는 것과 통성기도며, 예배 중에라도 찬송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더불어 성도의 교제는 마치 두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날개 하나로는 그 어떤 새도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처럼, 예배만 남은 기독교는 빠르게 쇠퇴하고 약화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입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 제 20조 1항에 나오는 종교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며, 대한민국에 5만이 넘는 교회 중에 극히 일부분의 사례를 가지고 전체 교회를 감시하고 제재하는 것은, 국가적인 재앙이고 민족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날이 멀지 않아 올 것이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막상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니 황당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이며, 이런 환경과 조건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3.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를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나치게 연약한 존재라는 것과, 둘째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공동체를 둘러싼 환경이 시시각각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 때 베드로에게 주어졌던 그런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나선 지난 3년의 세월은 베드로에게는 기대와 소망에 찬 세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적과 기사와 수많은 능력과 권위 있는 말씀으로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온갖 기적과 수많은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인기는 당시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의 시기와 우려를 사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자존심은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분의 제자라는 사실을 자랑거리였습니다.
또한 제자들 사이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권력에 대한 정치적인 야망도 실현될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 소망이 마지막 만찬 이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이상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어떤 위험과 불이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여종의 지나가는 말에도 베드로는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저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런 언행을 예수님은 미리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
30) 는 것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던 그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님을 향한 이런 저주가 쏟아져 나오리라고는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4. 요즘 심각하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신앙을 지키는 것은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이 충성심의 대가로 미래에 대한 그 어떤 보장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잘못되었거나, 미래에 대한 영광의 약속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스스로가 베드로처럼 너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의 고백은 진실된 고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그 분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충성된 마음과 진실한 마음도 환경과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초에만 해도 일반적인 한국인의 양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빌딩의 화장실에서 80만원 상당의 자기앞 수표를 습득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날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기 시작했고, 매일 식욕을 잃고 밤잠을 설치면서 순식간에 체중이 5키로나 줄었다고 합니다. 또한 평소에 안면이 있는 청소부 아주머니가 의심을 받아 불려 다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그 수표를 편지와 함께 신문사로 보내고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이러한 인간의 양심을 가리켜 초자아(Super Ego) 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선악에 대한 개념 자체가 상실되고 말았고,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초자아가 상실된 그런 시대를 만난 것입니다.

5.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이고, 진리와 비 진리의 싸움이며, 빛과 어두움의 전쟁터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공중권세를 잡은 사단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능력을 가지고도 비 진리와 어둠의 세력을 싸워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빛 보다는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진리를 미워하며 거짓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오죽하시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고 하시면서,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속아 넘어가서 우리 역시 마귀의 자식이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던 베드로도 순간적으로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나는 그런 사람은 만난 적도 없고 알지 못해, 내가 정말 예수의 제자라면 어떻게 내 입으로 그 사람을 저주할 수 있겠어? 나는 그 사람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상황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는, 일제 시대나 공산주의의 억압을 통해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으며,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에스더의 일사각오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사람 또한 많았습니다.
 
6. 12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나누는 만찬석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분명히 증거하기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요13:2) 다고 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행세했지만 실상은 처음부터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였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도 증거하시기를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나를 파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서로를 의심하면서 그가 누구인지 물었고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요13:26) 고 하시면서 가롯 유다에게 빵 한 조각을 건네고 난 후, 27절에 보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빛과 어두움의 싸움이 있었고,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 이미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만 만족할 수 없었던 마귀는 연약한 베드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못했던 베드로는 마귀의 시험에 보기 좋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가롯 유다나 베드로를 유혹해서 예수님을 배신하게 만든 핵심적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욕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귀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해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도 베드로도 나머지 제자들도 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7. 그러나 한 편으로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공회의원 모두가 모인 장소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가지가지의 증거와 증언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0-61절에 보면, 예수님은 온갖 잘못된 거짓 증언을 들으시면서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거짓 증언을 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온갖 잘못된 거짓증인의 증거를 들으시면 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예수님 자신은 그 어떤 대우를 받으셔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치는 온갖 거짓증언이 난무하고, 침 뱉음과 뺨을 맞으며, 십자가의 죽음의 위협에도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65절에 보니,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쳤" 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갖 수모와 아픔과 변명 한 마디 없이 참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11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은 이 모든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다 넘어갔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물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해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고 온갖 수치와 아픔에 침묵하실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죽음 이후에 오는 부활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 후에 찾아오는 영광이 얼마나 크고 놀랍고 위대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베드로는 3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는 이 말씀이 생각났고, 그래서 그는 바깥에 나가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교만한 마음으로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이 일이 성취되었다고 자랑하거나, 내가 마귀의 시험을 이겼다고 우리의 믿음을 자랑하지만,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연약하고 불쌍한 베드로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연약한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엡3:17절에 보니,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 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믿음은 고난 중에도 십자가를 붙들게 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죄를 회개할 수 있었고, 이 믿음으로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며, 그 위에 성령이 오심으로,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행1:8)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선물인 이 믿음을 지켜나갈 때, 우리의 연약함을 이기고 성령 충만함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그런 역사가 넘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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