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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와 그 아래(마가복음15:29-41)
고영수 2020-08-01 추천 0 댓글 0 조회 505
[성경본문] 마가복음15:29-41 개역개정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십자가 위와 그 아래(마가복음15:29-41/2020.8.2.오전)


1. 서기 303년,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로마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은밀하게 궁궐에 불을 질러 놓고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라고 뒤집어 씌워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채로 화형을 당했고, 어떤 사람들은 참수를 당했고, 어떤 사람은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져 넣기 했고, 예수 믿는 온 가족들을 집안에 몰아넣고 집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목을 베거나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되거나, 채찍과 고문, 창 칼과 독약, 십자가 형과 굶주려 죽이거나, 코를 베고, 눈알을 빼고, 뜨거운 다리미로 지짐을 당기도 했습니다.
어떤 마을은 군인들이 포위한 후, 통째로 불태워져서 주민 전체가 타 죽기도 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졌으며, 목숨을 걸고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가운데 로마의 남부 가울의 맛실리아에 빅토르라는 젊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의 하루의 삶의 대부분을 교회 일을 돌보며, 가난한 성도들을 도와주는 생활이었습니다.
이교도들은 그가 자신들의 우상숭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황제 앞에 고소를 하였고, 심문을 받기 위해 재판관 앞에 끌려 나갔습니다.
재판관은 말하기를, 이제라도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면, 모든 죄를 사해주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권을 잃지 않을 것을 말했지만,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황제가 주는 지위와 특권이 하늘나라의 임금에게 바치는 나의 충성심을 방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온갖 고문을 당한 후에, 황제 앞에서 최종 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황제는 우상제물을 차려 놓고 이곳에 제사하지 않으면 극형을 내릴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황제 앞에 차려진 우상 제단을 발로 걷어 차버렸고, 격분한 황제는 그의 다리를 잘라버렸고, 남은 몸뚱이는 매우 큰 연자방아의 맷돌에 깔려 고문을 당하는데, 놀랍게도 그 연자방아가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를 고문하던 간수인 알렉산더와 펠리시안, 그리고 롱기누스는 빅토르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고 자신들도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 사실이 황제에게 알려져서 이 세 사람과 빅토르는 참수 형으로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2.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과 경제적인 어려움은, 믿음을 지키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폭정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믿음의 선배들의 영적 싸움에 비교하면, 우리가 당하는 이 어려움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흔들림 없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표현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그 사람의 본성이 바깥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때때로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십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많은 가짜들이 교회 안에는 많으며, 엉터리 같은 교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의 인생은 십자가 위의 인생인지 아니면 십자가 아래의 인생인지 살펴서, 영적인 무장을 새롭게 하여 참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3. 본문의 전반부를 보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십자가 위에는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 아래에는 그러한 예수님을 쳐다보면서 조롱과 비웃음을 던지는 사람들로 나눠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같은 생명,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전연 다른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갈2:20)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십자가 아래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십자가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를 흔들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십자가에서 지금 내려오면 너를 구세주로 믿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예수님으로 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죄의 은총이 아니라 초월적인 능력입니다.

4. 지난주에도 언급한 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는 온 성 안에 소동이 날 정도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붙잡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어가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들이 느낀 것은 큰 실망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엄청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그 예수님과 지금 십자가 위에서 괴로워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동떨어진 그런 모습을 보고 실망하거나 혹은 사기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십자가 위의 인생은 저주받은 인생이고, 십자가 아래 자신들은 십자가와는 상관이 없는 잘나고 복 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비웃고 조롱하며 아예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십자가 위입니까? 아니면 아래입니까?
십자가의 위의 삶과 십자가 아래의 삶은 똑같은 환경과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도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십자가 위는 불쌍하고 연약하고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롱하고 비웃고 십자가를 저주의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은 나 자신이 우월함을 과시하는 행위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예수 보다는 내가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단언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잠시 잠깐의 고난은 있으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 있는 복된 자리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아무나 질 수 없습니다. 선택 받은 사명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5. 우리 교회 안에도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있는 사람들, 즉 복음의 사명자로서 십자가를 지는 인생들과 그 십자가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조롱과 멸시를 쏟아내던 사람들의 생각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인데, 만일에 예수님이 그들의 말대로 십자가를 버리고 내려오셨다면, 예수님과 우리는 영원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는 사탄의 궤계였고, 마귀의 유혹이며, 어리석은 사람들의 망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 뱉은 말은 어떤 경우에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향해 온갖 저주와 조롱을 퍼부었던 사람들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기원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함락되어 피바다를 이루었고,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더러워진 입술이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재앙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십자가 위의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처럼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온 세상에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조롱 받을 일도 아니고, 저주 받은 것은 더욱 아니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이 땅에서 택함 받은 선민들이 믿음으로 부활에 이르는 영광의 길인 줄 믿습니다.

6.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33절에 기록된 온 땅에 임한 어두움입니다.
낮 12시부터 시작된 이 어두움은 오후 3시까지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이미 과학적인 조사에 의해 밝혀진 대로 이 때의 어두움은 개기일식 같은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리고 37절에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시종일관 지켜보고 있던 로마의 백부장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39) 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감동적인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로마군대의 백부장 정도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의로운 자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시기심과 증오심으로 그를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예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 성령의 역사하심이 사라진 세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인류는 그 사실을 경험하고 말았는데, 흑암, 혼란, 고통, 두려움, 저주로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를 박해 하고, 성도들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조롱하는 이 사람들조차도, 이 지상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평안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해도, 이 땅 이 민족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더욱 중보 기도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7.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서 시종일관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부장에게 임한 놀라운 변화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그 당시의 갈보리 언덕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과, 이 일을 집행하는 군인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로 인하여 굉장히 소란스럽고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 위에 3시간에 걸친 어두움이 온 땅을 덮고 있었으니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도 불구하고 이 백부장에게 변화가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고난당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를 출입하면서 오랜 세월을 통해서 삶에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의 사건은 역사 가운데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세 전 부터 계획되어진 하나님 사랑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타락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의 역사와 더불어 이 십자가 사건도 미리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요, 또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이며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변화가 없는 생명,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인생은 죽은 존재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은 생명도 살리시는 변화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백부장 처럼 생명을 주는 십자가를 주목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8.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눈앞에 나타나는 능력이나 현실만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팩트, 팩트」 하는데 제 귀에는 이 세대의 메마른 신음처럼 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현실과 손에 잡히는 증거만 고집한다고 해도, 그들이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예수님 처럼 십자가 위의 삶, 즉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맛볼 수 없으며, 십자가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을 바꾸고 제도를 변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저주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목적도 이 땅 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라고 보내신 줄 믿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런 교회 그런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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