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 설교 자료 >
  • 주일예배 설교
예비하신 은혜(마가복음 15:42-47)
고영수 2020-08-15 추천 2 댓글 0 조회 55
[성경본문] 마가복음15:42-47 개역개정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비하신 은혜(마가복음 15:42-47/2020.8.16.오전)


1. 대한민국에서 촛불하면 최근에는 좌파들이 들고 행진하는 데모를 연상하는 전유물처럼 생각하지만, 자신의 몸을 태워서 어둠을 밝히는 이 촛불은, 원래 기독교에서 특히 의식에 집중하는 천주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었습니다.
초의 하얀 몸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며, 초의 심지는 그의 신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촛불을 드는 것은 신심, 곧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크리스마스 행사 등에서 사용하는 세 개의 촛대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기독교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장례 행사나 우상을 숭배할 때에도 오래 전부터 이 촛불을 켜서 죽은 혼을 위로하며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연결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상징성이 뚜렷했던 촛불은, 언제 부터인지 대중 가운데에서 정치적 이념의 공감력을 형성 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시위 꾼들의 무저항의 상징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시작하고 있는데, 그 일부분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요1:9-11) 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이 말씀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기는커녕 도리어 미워하고 대적하고 멸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첫째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요1:5)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 보다 어둠을 더 사랑"(요3:19)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요3:20)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일수록 어둔 세상에 빛을 발하는 교회를 미워하고, 악마와 같은 정권일수록 온갖 구실을 붙여서 기독교를 탄압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에 이러한 어두움을 사랑하고 빛으로 오기를 거부하면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어찌 이 세상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날까지 2천년의 세월을 통해 기독교가 소멸되지 않고 이 지상에서 죽은 영혼을 살리고 구원하는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며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분명한 이유 몇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내신 계시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이 사랑의 역사를 완성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의지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위에서 아들을 희생하실 정도로 우리를 더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위에 이 교회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개인이나 불법이나 권세나 악의 세력이 짓밟아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조건도 기한도 제한도 없는 절대적인 사랑일수록 소멸되지 않으며 끊어지지 않는 것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 세상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3. 둘째는 주님의 몸 된 이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뜻대로 지켜주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우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연약한 자를 붙잡아 주시고, 모든 환란에서 건져주시는 성령께서 이 교회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아리마다 사람 요셉과 같은 신실한 복음의 사명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인용한 요한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3:21절에 보니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 이라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나고 심판 받을 것이 두려워서 빛으로 나아오지도 아니하고, 그들이 예수님에게 행한 것처럼 도리어 생명과 진리의 빛을 발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미워하고 박해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으로 만연한 이 어두운 세상에도 생명의 빛을 보고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막15:21)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올라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침을 뱉는 가운데도 시몬처럼, 십자가를 대신 지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가 오늘 우리 가운데도 있다는 이 사실이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 가운데 죽임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로마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 고 고백하는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가 그에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4. 본문에는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과 관련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 사회적인 신분으로는 존경받는 공회원이며,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3절을 보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당돌하게 요청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매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이 사람이 이미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그의 요구는 그 당시로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정치적인 선동이나, 종교적으로 어떤 기득권을 노려서 사람들을 충동 하거나 어떤 결사 단체를 조직한 적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로마에게는 반정부주의자로, 유대인들에게는 신앙 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자로 몰려,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의 시신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때에는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고, 그 주변에는 사회적으로 힘도 없는 몇 몇의 여자들만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빌라도 총독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부귀, 그리고 안전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고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이러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5. 본문 43절 후반에 보면, "이 사람은---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을 들었으며, 생전에 그 분의 모습에서, 무엇보다도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조롱하였고, 평소의 가르침과 행하신 능력을 비교하면서 그의 죽음을 보고 많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그 죽음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인, 하나님의 나라를 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비 하신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믿음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그 분의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많은 기적과 능력으로 죽은 자도 살리시고 귀신도 물리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지지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능력도 기적도 없이 죽음에 갇혀 버린 그런 예수를 누가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믿음의 세계의 능력을 깨달았기 때문에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요18:28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이 더럽혀 졌다고 생각하고 그 날이 지나고 나서 물로 몸을 씻을 때 비로소 정결하게 된다는 율법의 규정에 의해서, 유월절 잔치에 참여 하려면 이런 부정을 미리 막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바깥 뜰에서 예수님을 고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레21:11절에 보면,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라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그 시체를 가까이 하면 부정한 몸이 되기 때문에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리마대 요셉은 그런 것들을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율법의 규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이방인 빌라도 총독의 관저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줄 것을 요구했으니, 종교지도자들에게 얼마든지 자신에 대한 공격의 구실을 줄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43절에 보니 당돌하게 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는 껍데기만 예수님을 믿고 따라 가는 형식적인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는다는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믿음을 인하여 당하는 그 어떤 희생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946년에 미국의 어느 의과대학 안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의대 2학년생인 모턴은 실험 중에 강력한 마취 기능을 가진 에테르라는 물질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수술 환자에게 사용하는 마취제로 소량을 사용해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미국 정부에 특허 신청을 하려고 하자, 그의 지도 교수인 웰치와, 실험실을 빌려 준 화학과 교수 잭슨이 서로 자기 이름으로 특허를 신청하려고 하는 바람에, 세 사람은 그 때부터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다가, 잭슨은 정신병자가 되고, 웰치는 도중에 자살하고, 발명한 당사자인 모턴은 뇌출혈로 인생을 끝내고 말았다고 합니다.

7.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어디에 묶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약이든지 도박이든지 게임이든지, 아니면 욕심이나 탐욕, 음란이든지 한 번 묶이면 인간의 힘으로 풀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에테르를 둘러싼 이 세 사람처럼 서로 망할 때 까지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실상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묶임을 받아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 중에 은혜인 줄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를 묶은 것은 세상의 정욕이 아니라 미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들어날까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을 가거나, 더 이상 어떤 능력과 기적도 베풀 수 없는 그런 예수님으로 인해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요셉은 그 분이 살아 계실 때에나 십자가 죽음 이후에나 그 분을 향한 사랑과 섬김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랑의 은혜에 묶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인연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에도, 요셉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21:23절에 보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고 하였는데, 요셉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시신이 그냥 십자가 위에서 방치되는 것과 말씀에 어긋나지 않도록 자신의 가족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무덤에 예수님을 안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이런 부분에까지 신경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보면 불행한 죽음이요 저주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는 믿음의 세계는, 그의 죽음이야말로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였고,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그 분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참 믿음의 증거요 역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고, 세상은 어찌 되던지 상관이 없이 형통한 길로만 나아가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은혜는 고난이나 수치나 죽음의 고통에서 멈추고 끝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저주와 죽음까지 넘어서 부활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요 능력인 줄 믿습니다.

이 믿음과 이 능력으로 오늘부터 영원토록, 나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십자가 복음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이 시대의 믿음의 산 증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무덤을 막고 있는 것(마가복음16:1-11) 고영수 2020.08.22 0 46
다음글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고영수 2020.08.08 1 40

大阪中央教会 ⧧537-0023 大板市 東成區 玉淨 3-1-33 (06) 6973-5540, 6920-1569 www.chuo.co.kr / sirokita@gmail.com

Copyright © 오사카중앙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22
  • Total2,356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