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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요단강(신명기3:23-29)
고영수 2020-12-26 추천 1 댓글 0 조회 686
[성경본문] 신명기3:23-29 개역개정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인생의 요단강(신명기3:23-29/2020.12.27.오전)

 

1. 사진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만나는 과제는 내 눈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면, 칠흑 같은 어둠으로 깔려 있을 때가 많은데, 문제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하늘은 정말 캄캄한 하늘일까?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은 사물을 바라볼 때, 그 기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귀를 만드실 때 온갖 소리를 다 듣게 하셨다면, 우리는 귀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로 인해 몸을 지탱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눈과 귀 뿐만 아니라 온갖 것을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당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만일 내 귀가 지구 전체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 몸은 순식간에 파괴되고 말 것이고, 내 눈에 천사나 귀신같은 영적인 것들이 보인다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카메라를 가지고 캄캄한 밤하늘을 향해 셔터를 누르면 새까만 밤하늘이 아니라 푸른 색깔의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 내가 보고 느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구나.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느끼지 못할 뿐이지, 내가 모르는 세계의 넓이는 무궁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우주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인류는 아직도 천 분지 일도 모르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 몸의 신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눈과 귀를 의심하고 우리의 지성과 경험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인정하고 그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의 눈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우리의 지성은 생명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살아가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다툼이 일어납니까? 

그런데 이런 분쟁의 대부분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과연 내 생각과 판단이 바르고 정확하며, 내 결정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정치, 경제, 종교, 사회적인 현실은 물론이고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는 이런 상황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의견과 대책을 내어 놓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며 자신의 삶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반복해서 설명을 해도 잘 모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항상 선을 행하시고 복 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희생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내 인생의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내가 계획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그것이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면서, 걸어온 발걸음을 돌아보면 좋았던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아쉬운 것도 섭섭한 것도, 분노와 억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우리 모두는 이런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2021년의 새로운 시간으로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나온 과거는 어떻게 정리를 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미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한 평생 살아왔던 지도자 모세를 통해서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3.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요단 건너편에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26절을 보면, 두 번 다시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다 요단을 건너가는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더구나 자신의 시종인 여호수아도 건너가는데 왜 나는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건너가는 자들과 건너지 못하는 자들의 차이가 무엇이며, 모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이 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 당했을 때에 맛본 인생의 쓴 잔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섭섭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이 일을 위해 평생을 준비하고, 광야 40년의 세월을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 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출애굽으로 부터 시작하여 지난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의 능력과 위엄과 역사하심을 모세는 다 보았고 들었고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할 자가 없으며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나 한 사람 모세가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왜 모든 이스라엘이 들어가는 가나안을 모세는 들어갈 수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4. 신32:49-52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민20장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을 괴롭힐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을 모아 놓고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였지만, 모세는 화가 나서 반석에게 명령하는 대신에 지팡이를 잡고 반석을 쳤고, 그래서  물은 솟아나왔지만 그것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 하고, 이 때 이미 예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인간적으로 보면, 가나안 땅을 밟을만한 충분한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애급에 10가지 재앙을 쏟아 부어 바로 왕을 이기고 출애굽 한 뒤로, 40년의 세월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고 생명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늘 모세를 괴롭혔고, 나중에는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으면,  내가 낳지도 않은 이 백성을 왜 나에게 맡겨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 불평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므리바의 사건을 40년 간 잊지 않고 기억하신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모세만큼 이스라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면 땅을 분배하는 과정과 국가를 형성하는 일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소원이 무엇인지 잘 아시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5. 지난주에 전도서를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은,  8:17절로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는 말씀입니다.

내 생각에, 또는 우리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이런 사람을 불러서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전연 다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3-36) 고 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 좋고 그 일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요단강을 건널 수 없으며 너는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세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를 막론하고 인생은 내 힘과 내 뜻대로 건너갈 수 없는 요단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왜 안 되며, 남들 다 건너가는 요단 강을 왜 건너지 못하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지금까지 살면서 반드시 이것은 이루어야 하고, 이 선 너머로 무슨 일이 있어도 건너가고야 말겠다는 그런 생각을 접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보기에는 의지가 약해 보일수도 있고,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도리어 이것은 모세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 많으신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 주님의 일에 나는 잠시 잠깐 쓰임을 받는 청지기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접지 못하고 밤잠을 자지 못하며 애를 쓰고 고민하며 수고하는데, 이런 일에 대해서 전도서는 기록하기를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6. 우리에게도 수많은 인생의 요단 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간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건너지 못한다고 낙심 할 이유도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침상에 드러누운 환자라도 건너갈 수 있을 것이고, 건강한 장정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건너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너는 여기까지야,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나만을 향한 뜻이 있고 때가 있고 나 한 사람을 위한 놀라운 계획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세처럼 너는 여기까지, 요단 강을 건너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 내가 누군데, 내가 지금까지 세운 공로가 얼마나 많은데, 나를 이렇게 취급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이유는 하나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계획하신 축복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린 위암 환자의 위를 날카로운 칼로 잘라내는 의사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니 저 의사가 사람을 죽이고 있네!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 귀한 위를 잘라 내어서라도 이 생명을 살리겠다는 의사의 뜻과 수고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만 놓고 본다면, 이 의사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도 내가 안다면, 요단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7. 그러므로 인생이 요단강을 건너고, 약속의 땅에 발을 들려 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더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8절에 보니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그를 후계자로 삼아서 그가 모세 대신에 이스라엘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꼭 내 손으로 끝장을 봐야 잘했고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아브라함의 대에게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이삭에게, 이삭의 신앙을 계속해서 야곱에게 이어가는 신앙의 전승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것이 인생의 축복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여호수아서 24장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12지파가 땅을 분배하고, 그 땅에 평화가 온 것은 여호수아의 힘이나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요단 강을 건너가거나 건너지 못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요단 강을 건너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따지며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참 믿음의 사람이라면, 지금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날 위해 더 놀라운 뜻을 가지고 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죄인 되었던 나 한 사람 살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된 성공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그 분의 계획에 의심 없이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는 믿음입니다.

 

8. 이제 2020년도 닷새 남았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앞에는 수많은 요단 강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건너는 줄로 모르게 그 강을 건넜는데, 어떤 때에는 건너갈 수 없는 깊은 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때 건너지 못한 것이 참으로 잘된 일이었고, 또 그 때 요단 강을 건넌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뜻대로 되 못했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단 강을 건너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 공간에 너무 작은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며, 이 가운데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으며, 나를 위해 계획하신 일과 행하시는 일도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신년에는 더 놀라운 계획과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고 하면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새해에는 믿음의 용사요 간증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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