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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누가복음22:39-46)
고영수 2021-03-20 추천 0 댓글 0 조회 612
[성경본문] 누가복음22:39-46 개역개정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갈등(누가복음22:39-46/2021.3.21.오전)


1. 지금의 세상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는 보수냐 진보냐, 사회적으로는 남성이냐 여성이냐,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정부는 내국인이냐 외국인이냐를 놓고 차별합니다. 그리고 성정체성을 가지고 논란이 많다보니 이전에는 남성과 여성밖에 없었던 구분이 이제는 성적인 종류도 수 십 가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국 정부가 건강가정기본법을 개정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을 해체하려는 반인륜적 행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남자로 태어나도 나는 여자라고 주장하면 여자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부터 교사들이 이상한 것을 가르쳐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은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는데, 놀란 것은 분명히 악기점인데 그곳에서 악기를 팔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이제는 컴퓨터로 세상의 모든 악기를 혼자서 연주할 수 있어서, 더 이상 악기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곡이나 노래가 이제는 유투브를 통해 빠른 속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생각하던 세상은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나오는데, 16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 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17장에서 이런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은 많은 종류의 구분과 소속이나 수준을 나누어서 사람을 차별하고 관리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람의 종류는 딱 두 종류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유한 사람이냐 가난한 사람이냐, 학벌이 있느냐 없느냐,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냐, 아니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냐는 이것입니다.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구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적절하고 정확한 구분은 없습니다.


2.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천지가 개벽을 해도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셨는데, 문제는 이 일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컴퓨터를 가져도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다워도, 이 사실을 경험하거나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고난 주간과 부활절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을 재조명하면서 더 깊은 은혜의 세계, 더 놀라운 축복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한 마디로 이 세상과의 충돌의 생애였습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출생하실 때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돌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의로우시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를 행하려고 할 때, 당연히 불의와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시면, 육체적인 본능과의 충돌이 불가피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면, 그것을 방해하고 거역하는 영적 세력과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3.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육체적 본능에서 일어나는 자기 사랑에 대한 욕구와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수많은 충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며, 수많은 갈등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갈등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힌 것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가질 때,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가 방해를 받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가치관이나 책임 의식과 현실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고민하게 되고 갈등하게 됩니다.

내 안에 정반대의 생각이나 주장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 고민이고 갈등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내적 갈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후, 조금 떨어진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시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42절에 보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잔이 무엇입니까? 고난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 당시로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주는 그 육체적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고, 동시에 인격적으로 느끼는 멸시와 천대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맛보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해야 하는 고통은 다른 그 어떤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4. 마26:37-38절에 보면, 십자가 때문에 고민하고 슬퍼하시는데, 그 때의 심정을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 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막14:33-34절에는, "심히 놀라시며 슬프하" 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12:27절에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의 고민과 고통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반박할 수 없는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43절에 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고 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거나 야곱 처럼 씨름도 하지만, 천사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힘을 보탠다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일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대로 내 버려두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중노동이냐 생각하겠지만, 기도의 강도는 신앙심과 마음에 따라 다릅니다.   

주문처럼 습관적으로 하는 기도, 마음과 정성을 담은 기도, 생명을 걸고 하는 기도는 각각 다릅니다. 그렇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44절에 보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의사 출신인 누가가 표현한 내용으로, 전문용어로 헤마티드로시스(Haematidrosis) 현상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갈등 때문에 몸에 일어나는 피로현상으로 혈관이 파괴되어 땀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의 기도는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천사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십자가의 형벌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두려움과, 우리 죄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고통과 갈등 속에서 육체와 마음이 함께 망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5.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기도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놓고 인간적으로 갈등하며 이렇게 기도해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에게 속한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생명들을 세상과 마귀에게 한 사람도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몸부림치며 생명을 걸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생명을 건 기도였고, 물러설 수 없는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중보기도라고 말 하는데, 중보기도는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연약한 인생으로서는 예수님처럼 참다운 중보기도를 올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중보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같은 상태, 같은 상황 아래에서와 같은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고통을 당하는 그 사람 본인이 지금 내 안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는 이유는, 요17:12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생명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지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6. 예수님 안에는 두 가지 갈등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는 사명감에서 나오는 의지와 그것을 거부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일으키는 충돌이요 갈등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라는 저주의 죽음을 피하려는 육체의 연약함과, 그것을 이기고 넘어가려는 신앙적 결단과의 충돌이요 갈등이 있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삼킴을 당하고, 생명이 사망에 사로잡히고, 진리가 비진리에 밟혀 버리는 그런 부끄러움을 거룩하신 예수님은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지난주에 제게 일어났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고 분노가 뚫고 올라오기 시작하니, 모든 것을 걸고 이것은 싸워 이겨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마음이 들었지만, 새벽에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내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 달라고, 성령님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달라고 기도했더니 정말 내 마음을 만져 주심을 느꼈습니다.

어느 순간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갈등으로 고민하는 대신에 주변 상황을 새로운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어떤 사명감에 불타는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느낌이 간절했지만, 자신이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42절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 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갈등이 기도로 사라지고 문제를 정리하셨다는 말입니다.

   

7. 그러나 노예에게는 갈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주인이 시킨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책임과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갈등의 수치는 올라가고, 사방에 있는 것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들의 경우에, 신앙의 양심은 갈등과 충돌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롬7:21절 이하에서 사도바울도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과 충돌을 자신 속에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견디기 어려운 나머지 그가 외친 절규가 무엇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자신을 비참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같은 육신을 입고 계시던 예수님도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갈등과 내적 충돌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의 문제를 기도로 풀어나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내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죄와 허물도 없으시면서, 우리 때문에 많은 고난과 부끄러움을 당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예수님이 당하신 인간적인 갈등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 그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구하는 기도를 올린다면, 우리도 예수님 처럼 고난의 십자가를 향해 감사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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