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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누가 해결하는가(누가복음 9:12-17)
고영수 2022-01-08 추천 0 댓글 0 조회 754
[성경본문] 누가복음9:12-17 개역개정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문제는 누가 해결하는가(누가복음 9:12-17/2022.1.2.오전)

 

1. 지난 31일 아침에, 텔레비전에서 3대를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야마모또 히데가쯔(67세) 라는 사람의 삶을 소개하는 방송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나가서 참치(다랑어)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데, 혼자서 백 수십계의 낚시를 풀었다가 거두어들이는데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그의 부친이 하신 말을 떠올렸습니다.

歩み続けばいつかは当たる。의역을 하면,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거둔다는 뜻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아들이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바다를 향해 거물을 던지며 참치와 씨름을 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만 주신 사명의 삶을 깨닫고 그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사람들은 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세상과 타협을 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을 하기 시작하면 늘 진의와 실체는 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 내 마음에 드는 좋은 받아들이기 때문에 늘 손해를 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싶은 것만 골라하고, 믿고 싶은 것만 아멘하고, 싫은 것은 남이 하도록 만들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은혜가 안 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내가 듣기 좋은 것만 받고, 싫은 것은 안들은 것으로 모르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우리가 가진 믿음의 크기도 점점 작아지고 말 것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도, 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또 내일 같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구분할 줄 모르고, 구분된 시간에 맞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줄 모른다면, 우리는 이런 인생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겠습니까?   

오늘 신년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생각해 볼 것은, 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2021년도에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2022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내게 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의미를 깨달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과연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를 통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깨닫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한 해를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2.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만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 이하를 보면 먼저 시간적인 위기가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날이 저물어 간”다고 하였고, 두 번째는 장소적인 문제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 이라는 사실과, 세 번째의 문제는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이나 바다에서 조난을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만난 경우입니다.

날이 저물어 캄캄하여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되는데다, 내가 위기를 만난 것을 알고 쫓아와 도와줄 만한 사람도 없고, 마실 물과 양식도 없으며, 또한 추운 겨울이라면 남은 것은 절망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난 위기가 불행 중에 다행한 것은, 그들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것일가요?

아닙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리어 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불행중 다행은, 다름 아니라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삼중의 위기를 만나면서, 그 문제를 에수님에게로 가져 가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제안이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몰랐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하루 종일굶주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를 보면 남자만 5천 명이었으니,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계산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문제는 해는 떨어지고, 찬 바람도 불어오는데 허기진 배를 채울만한 양식이 그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3. 이때, 제자들은 위기를 만나자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무엇입니까? 

各自圖生, 다들 흩어져서 자기 살길을 찾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책임한 태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지울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13절에 보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あなたがたで、何か食べる物を上げなさい。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무슨 능력이나 재주가 있다고 이 문제를 그들에게 맡기신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상식 밖의 이런 불가능한 일을 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평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9:3절에 보면,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냥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셔놓고, 이제와서 어려운 문제가 닥치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니, 그야말로 예수님 자신은 이 문제에서 쏙 빠지고 애꿎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책임을 떠 넘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 어떻게 제자들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의문을 가지고 읽게되면 그곳에서 답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막6:37절에 보면, 빈들에 모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한끼의 식사에는 그 당시의 화폐로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데나리온의 가치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받을 수 있는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날로 환산해 보면, 2백만엔 정도의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으니 말이 안되는 말씀입니다.

 

4.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말도 안 되, 이렇게 무리한 말씀을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말도 안되시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군중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먹을 것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요6:9절에 보면, 제자들이 군중들 가운데서 찾아낸 것은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습니다.

우리가 깨달을 것은, 전능하신 예수님을 따라 다녀도 인생이라면 반드시 위기는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십자가를 져야 할 일이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고 그것 때문에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럴 때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2절에 보면,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자신들끼리만 고민 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 한 가지는, 그 누구라도 문제 때문에 망하는 인생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만난 문제를 내가 어떻게 보고 생각하며,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야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 주어진 모든 문제를 반드시 주님께로 가져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5. 그들의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군중을 각각 50명씩 짝을 지어 앉히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15절에 보니,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라는 말씀이 나오고, 이 일이 다 끝난 다음에는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들여다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사건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도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히11:8절에 보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히11:8) 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요6:53-58절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곳에 보면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를 가지고 그들과 대화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문제를 통해 제자들에게 믿음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요6:6절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성주의요 합리주의적인 반응뿐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2백 데나리온의 돈이 들것이고, 우리에게는 그런 돈이 없으니, 다 여기저기 마을로 흩어 보내어 그곳에서 각자가 해결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한계점입니다. 아니 현대 지상 교회들의 문제점입니다.

 

6.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다른 이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믿음없는 이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 두고도 그를 보지 못하고, 그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발등에 떨어진 문제만 보고 고민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2천 년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로 끝나지 않았고, 오늘 우리의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고민하는 대신에 주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거나, 믿음으로 살려는 그런 몸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려면 내가 원하는 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인생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이 믿음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희생하거나 고민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어 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편승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값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인생의 문제도 다 그와 같이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아서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습니까?

또 다른 깜짝놀랄만한 선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능력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농부처럼 믿음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하며 자라나도록 거름을 주고 정성을 다해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믿음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7. 매우 작은 것이지만 순종을 통해 그것이 주님께 드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요6:9절에 보니, 그것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어린 아이가 가져온 것으로, 그 아이의 손길을 통해서 제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다시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어린 소년의 손에서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가진 소유가 많고 적은 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의 재능과 능력의 연약함과는 상관이 없이, 그것이 주님께 드려졌을 때, 변화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축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요2장에 보면,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랄 때,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하인들의 순종을 통해서 물이 변하여 가장 맛있는 포도주로 변하고,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혼인 잔치의 위기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요2:1-11). 

우리 인생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작게 보이고, 내 소유도 보잘 것이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이 문제를 만나고 위기에 빠질 때,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헌신되어질 때에는,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없는 놀라운 변화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늘 내가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축복을 일으키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받는 축복과 능력은 지금 내가 얼마나 주님께 드릴 수 있으며, 주님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그래서 내가 주님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8.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본문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온 어린아이 한 사람의 양식을 손에 들고 축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양식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 것은, 예수님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 곧 그의 창조의 능력고 인생을 사랑하시는 축복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 어떤 위기 가운데, 어떤 문제를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예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이라는 해방의 역사를 가져온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라는 믿음의 사람의 순종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비를 내린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말라죽어 가는 이스라엘 땅에 생명의 비를 하나님이 내리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7절에 보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주님의 손길을 통해 해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섯도 요6:11절에 보면, 그들이 원하는대로 먹을 것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은 것을 12광주리에 거두어 들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응답받은 자가 누리는 넉넉한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본문의 말씀처럼 때가 좋지 않고(날이 저물고), 환경이 나쁘고(빈들이요), 인간적인 한계의 상황(너무 많은 군중)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문제는 내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 장래를 알수 없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과 고난의 연속이지만, 주님은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깨닫고 주님께 내 삶을 맡긴다면, 주님은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 모든 고난에서 구원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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