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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로마서6:1-5)
고영수 2022-06-04 추천 0 댓글 0 조회 547
[성경본문] 로마서6:1-5 개역개정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나는 누구인가?(로마서6:1-5/2022.6.5.오전)

 

1. 술주정뱅이에 노름꾼에 집안을 폭력으로 어지럽히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아무리 결심하고 노력을 해도 정상적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과 인격이 망가져서 고통당하는 사람 중에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더라면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아버지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죄와 부끄러움에 영향을 받고, 가슴속에는 분노와 열등감을 가지고 자라나다가 사회에 나가면, 공공의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흉악 범죄자들이 이런 비정상적인 가정과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선천적으로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그런 것을 선하게 활용할 수가 없는 것은, 그가 매일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대부분 비정상적이고, 그런 것을 통해서 매일 고통받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친구를 사귀는데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나고 내가 어떤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그의 미래는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짧은 본문의 내용에 그런 사실을 5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감수성을 가진 인간은 오늘 내가 누구와 연합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부모는 자식에게도 불신앙을 물려주고,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인생의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질이나 세상의 출세를 인생의 최우선 목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가정에서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자녀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든지 상관이 없이 인간의 공통된 문제점은 죄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인간에게 주는 엄청난 영향력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부터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조차도 별 망설임없이 불신앙의 세상 사람과 결혼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알게 모르게 불신앙의 영향 아래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환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머물러 선 자리는 어떤 곳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며, 함께 매일 만나서 일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내거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맹자(BC372-289) 라고 하면, 대부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맹자의 모친은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키웠는데, 처음 이사 간 곳이 공동묘지가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매일 아이들과 어울려 하는 놀이라 장례 놀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아이를 교육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모친이 그다음에 이사한 곳이 시장터 옆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매일 장사치 흉내를 내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끝에 다시 이사간 곳이 서당으로 요즘으로 하면 학교 옆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맹자는 늘 책을 읽고 공부하는 흉내를 내다가 마침내 공자의 인(仁)과 맹자 자신의 의(義)에 바탕을 둔 교훈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국가의 근간을 일으키는 휼륭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3. 오늘 본문의 시작은 5:20절에 기록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 다는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반론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죄가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치니 그렇다면 죄를 더 많이 짓는 것이 좋겠다는 그런 생각에 대한 반론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핵심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내가 지금 누구와 연합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원래 인류의 대표인 아담에게 속하여 그와 연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담이 범죄함으로 우리 또한 아담의 범죄에 가담한 자가 되었고 그의 죄에 대한 대가로 죽음과 삶의 고통을 맛보게 된 존재입니다.

이것은 내가 어디에 속해 있으며, 누구와 연합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가요 결과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2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죄가 더 이상 그 사람을 주관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죄의 영향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고백을 한 후에 누구나 받게 되는 공개적인 의식입니다.

이 의식을 치루는 이유는, 죄인되었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후에 다시 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부활의 영광을 입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우리가 소유하던 죽음을 향해 두려움과 고통을 안고 나아가는 그런 생명,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주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은 사람들이 지은 죄를 합리화하려고 애를 씁니다.

특히 요즘 성차별을 내세우면서 온갖 성적인 타락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죄는 죄일 뿐이고 그 대가는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저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죄를 인생의 실수라고 말하지 않고, 죄를 유행이나 문화의 산물로 여기지 않고 그냥 "죄의 삯은 사망"(롬6:23) 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고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곳에 전가시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직 죄에 대하여 죽지 않은 죄의 노예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분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산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합하고,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 4절에 보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 다고 하였

는데, 여기서 합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스」로 이것은 어디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고, 또한 그의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은 마치 아담이 우리를 대표해서 범죄함으로 우리를 다 영원한 저주와 고통을 당하게 한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함께 죽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8절에서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 라고 하였습니다.

 

5. 그뿐 아니라 5절에서도,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고 하였는데, 여기서 연합이라는 단어는 함께 자라거나 접붙임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조금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함께 죽었는데, 그래서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계속해서 그와 함께 다시 살되, 계속해서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돌감람나무와 같은 아담에게 붙어 있었는데,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돌감람나무에서 꺾어서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님에게 접붙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돌감람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포도나무로 접붙임을 받은 후에는, 누가 와서 우리를 꺾으면 포도나무를 꺾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를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귀가 괴롭히는 그런 포도나무의 가지가 있다면, 이것은 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마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믿어도 평안이 없고, 하나님 자녀로서 누리는 기쁨도 감사가 없습니다.

 

6. 우리는 과거에 죄에 사로잡힌 인생으로 죄에게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전도자를 통해서 주님이 날 찾아와 주셨고,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삶을 살게 되었고, 죄가 주는 사망의 고통이나 저주와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는 죄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아담처럼 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를 대적하는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로서 우리 혼자서 어떻게 그를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아무리 결심을 해도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운데로 되돌아가는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포도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있으면, 나는 이미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니 마귀는 나를 이길 수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유혹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의지로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가까이 계시면서 도우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14:7-8) 이라 하였습니다.

 

7. 그렇다면 지금 나는 누구며, 무엇입니까?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군대에는 또다른 알렉산더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졸로 매우 게으르고 수준 이하의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군대 안에서는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경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알렉산더 대왕은 예고도 없이 그를 방문하여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두가지의 명령을 내릴 것이다. 하나는 너의 이름을 바꾸든지, 그렇지 않으면 너의 삶을 바꾸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자요, 생명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더 이상 우리는 죄아래 사로잡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삶인 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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