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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 에브라다(미가5:2-4)
고영수 2022-12-10 추천 0 댓글 0 조회 622
[성경본문] 미가5:2-4 개역개정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3.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베들레헴 에브라다(미가5:2-4/2022.12.11.오전)

 

1. 2012년에 69세로 타계한, 일본 장기연맹의 회장을 지내고, 영세기성(永世棋聖)으로 추대받은 요네나가 구니오(米長邦雄) 10단이 말하는 장기세계를 보면, 빠르면 20살에 유명한 타이틀을 획득한 후에 실력이 향상되거나 현상을 유지하다가, 40세를 넘어가면 체력과 기억력에 한계가 오면서 실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력이 떨어졌다고 순순히 타이틀을 획득한 채로 은퇴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반드시 도전자가 나타나고 그 도전자에게 타이틀을 빼앗기게 되고, 그다음에 다가오는 예선에서도 이리저리 신진들에게 처참할 정도로 무너지고 나서야 은퇴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네나가씨는 생각하기를, 왜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패배하고 무너지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개설한 연구소에서 젊은이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기사들에게는 자신만의 버릇이 있고,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특기가 있는데, 이전에 타이틀을 획득할 때에 사용했던 영광의 한 수가 이제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스승에게 이건 10년 전에는 좋은 수였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고, 이제부터는 이런 수를 사용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여러 가지 충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요네나가는 생각하기를, 지금까지 나이를 먹으면 체력과 기억력의 한계로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대회에 나가면 패배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을 대할 때, 세 가지의 원칙을 정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으스대지 않는다, 둘째는 설교하지 않는다, 셋째는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젊은이들과 대화가 되고, 그들과 하루에 7시간씩 함께 연구에 몰두한 결과, 요네나가는 40세를 지나서 50살 때까지 명인의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었던 18번의 전법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자랑이 되는 그런 수를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수를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2. 시간이 흘러가면 젊은 사람도 노인이 되고, 세상도 이전에 내가 잘 나갈 때의 세상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과 함께하며 지식이나 능력을 공유한다고 해도, 한계는 찾아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12:1)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젊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능력인지 다윗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강림절을 맞아 선택한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에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 번 택함을 입은 백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징계니 심판이니 고난을 겪은 후에는, 반드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된 내용이 이 미가서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B.C 8세기 호세아나 이사야 선지자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 사실을 1:1절에 보면,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 라고 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하스왕은 다윗 왕가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상류층의 지나친 사치와 방탕함은 물론이고,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고, 여기에 더해서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하스 왕은 예루살렘 성전의 성물을 가지고 우상숭배에 사용하기도 했고, 강대국 앗수르에 붙어서 정치적 생명을 연명하려고 하다보니, 앗수르의 우상과 풍습을 유대 땅에 들여와 종교나 문화면에서 혼합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소망이 없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3. 그래서 유다 예루살렘이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미가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회복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망이 없이 고통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소망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대로, 2절의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떡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

옛 한국 속담에,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는데, 인간사회의 중심은 한양, 서울이라는 뜻이고, 그곳에 가야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고, 출세하고 성공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비록 깡통을 차고 밥 빌어먹어도 너도 나도 서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 베들레헴은 유대나라의 지명에도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최소한 인구가 1천명을 넘어가야 행정단위의 마을로 인정을 받았는데, 베들레헴은 노무 작은 촌락에 불과했기 때문에 존재감이 전연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할 지도자가 나온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젊었을 때, 한국에서 전도를 하다 보면, 대형교회에 나가는 것을 벼슬처럼 내세우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집사, 권사, 장로 직분을 받은 것을 대단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서울 살다가 경기도나 지방으로 이사가면 젊은 사람들은 인생 다 살았다는 듯이 생각하고, 일본도 동경을 벗어나 지바껜이나 사이다마껜으로 이사를 가면 죽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존재감이 하나도 없는 이런 베들레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나오겠다고 했으니, 누가 이것을 믿으며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일에 소망을 두겠습니까?

더구나 주어진 현실은 가난한 자가 약탈을 당하고 약한 자가 짓밟히고, 지도자들은 백성을 억압하고 있는데, 누구의 말을 믿고 소망을 가지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국회의원이니 노조니 하는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경기가 날 지경입니다.

그들이 메주로 된장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데, 그런 사람들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4. 그런데도 하나님은, 유다 예루살렘은 죄로 멸망하지만, 때가 되면 이곳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왕국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싶지도 않고 믿음을 수도 없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하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50:21절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같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좋으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내가 싫은 것은 하나님도 미워하시는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 다고 하면서, "이는 하늘이 땅 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8,9) 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작은 것은 약하고 보잘것이 없으며, 강한 자를 이기거나 앞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서 열방 안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고, 연약한 다윗을 통해서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연약한 에스더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주어진 환경이나 우리의 가진 소유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절망과 고통 속에서 빠진 자라도 그곳에서 믿음으로 일어서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60:22)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5.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정하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3절에 보니,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라 함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기까지 진통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듯이,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참 평안과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진통의 과정을 통과하기 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시대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직전에는 시간이 갈수록 해산하는 여인처럼 진통이 커지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해산의 진통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 시대의 믿음의 인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믿음의 경주를 중간에서 쉬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며 인내하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인 싸움이나 신앙의 완성도 그분이 오셔야 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도를 해서 불신자 한 사람이 오면,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기 전과 그 이후가 전연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변한 것입니까? 영접하는 자 안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맛볼 수 없었던 평안을 알게 되고, 구원받은 자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니 인생의 방향이 바뀌고, 그 방향이 바뀌니 삶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 한 가지를 더해서, 본문 3절의 말씀대로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급하고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만, 믿음의 힘은 인내와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잠시잠깐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6.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내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4절에 보니,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양떼와 같은 우리들이 세상과 마귀의 사냥감이 되지 않도록 완벽하게 지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7:14절에 보면, 양떼 같은 우리를 가리켜 주의 기업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목자가 양떼를 살피며, 그들이 푸른 초장과 맑은 물로 배불리고 만족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7:19-20절의 말씀에서,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으면 형벌을 받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범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징계와 심판을 하시되, 이전처럼 다시 회복케 하시고, 여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베들레헴은 너무 보잘 것 없는 촌락이지만, 그 베들레헴 떡집이 변하여 이제부터는 에브라다, 곧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의 땅으로 불리는 것처럼, 우리를 그렇게 새롭게 하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소망이 없는 인생이라도 주님께로 나오면, 자신의 십자가로 흘리신 보혈로 죄를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풍성히 부어 주실 것입니다.

 

7. 일본의 중소기업 사장이 사업에 실패하고 지방에 내려가 막노동을 하는데, 점심시간에 산 음식점을 찾아갔다가 들어가보니 의외로 고급 음식점이었습니다. 그래도 왕년에 사장이라 돌아가기도 그렇고 한쪽 구석에 앉았는데,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부끄러움에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종업원이 다가와서 친절하게 오차를 따라주니 눈물이 났다고 했습니다.

이때의 감동을 기억하고 그는 수십년 동안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그런 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작은 친절, 평범하지만 정성이 담긴 행동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새롭게 할 수 없겠습니까?

인간의 행복은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남다르게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영원한 목자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죄인 되었던 나를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하시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그 은혜를 알게 될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상처받고 낙심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베들레헴 같이 존재감도 없는 작은 존재를 이스라엘의 영광인 에브라다로 바꾸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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