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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본 체하지 말고(신명기21:22-22:12)
고영수 2023-05-13 추천 0 댓글 0 조회 214
[성경본문] 신명기22:1-12 개역개정

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6.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11.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12.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못 본 체하지 말고(신명기21:22-22:12/2023.5.14.오전)

 

1. 이스라엘은 언약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더불어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어울리는 규범이 필요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짚어보면,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따르는 유일신 사상과,

공동체 중심에는 항상 중앙 성소가 있어서 그곳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무엇보다도 가나안 땅에 살면서 그 가나안의 모든 요소를 배제(排除)하는 삶을 사는 것과,

이웃은 서로를 사랑하고 도우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내용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못 본 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고대 사회나 현대사회에서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공동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개인 중심의 인간관계에서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을 보면, 우리의 이웃은 법이나 규범도 없는 세상처럼 이웃을 협박하고 이웃의 소유를 탈취하고 폭력을 일삼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도움을 주고, 협력하고 섬기면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눅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2. 이스라엘이 남북왕조로 나뉘면서, 남쪽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그곳에 갈 수 없으므로 이곳저곳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남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이런 행위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편견이 시작되었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자, 앗수르는 각 나라 사람들을 혼합시키는 정책을 펴는 가운데 이스라엘 땅에는 많은 이방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래서 정통 유대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온전한 이스라엘로 보기 어려웠고, 그래서 그 지역 사마리아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원수처럼 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현대사회 같으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처지가 이해가 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고대사회의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은 획일적이다 보니, 유다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융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은 유다 사람이고, 그를 도와 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왕따에 차별받고 미움의 대상이 된 사람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오히려 같은 유대 사람이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만난 이웃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갔지만, 차별과 미움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고, 그 상처를 싸매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강도만난 자를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0:36-37절에 보면,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이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도 네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모른 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웃은, 민족의 장벽이나 국경이나 이데올로기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3.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한 이웃의 어려움이나 위기를 뛰어넘어 이웃의 소유에 대해서도 같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길 잃은 짐승을 보면 못 본 체하지 말고 그 주인을 찾아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이웃 사람의 짐승이나 물건에 대한 행동이라도, 4절에 보면, 형제를 도와 그들을 일으켜 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요즘 전 세계의 흐름을 보면, 이웃이나 공동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오직 남은 것은, 승자와 패자가 있을 뿐입니다.

승자와 패자라는 용어는 전쟁에서 사용되는데, 이제는 인간의 삶 전 영역에서 적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사이에는 서로를 돕는 이웃이 아니라 엄격한 주인과 종의 관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배고픈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도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니 못 본 체하고, 정치 세계도 좌우로 나뉘어서 상대방의 어려움을 마치 원군을 만난 심정으로 기뻐하고, 이참에 아예 숨통까지 끊어 놓을 요량으로 온갖 악의를 품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 세상은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이웃보다는 원수가 더 많은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4. 사도바울은 이웃에 대하여 말하기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복된 세상으로 만들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도 십자가 앞에서 원수로 행하던 죄인이기에 불쌍히 여기고, 공분을 일으킬 만한 악한 사람이라도 그의 악행이 무지하고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이니 불쌍히 여기고, 내게 손해를 끼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야말로 과거에는 주님 앞에서 죄인 되었던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용서받고 은혜를 입었으니, 이것을 생각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긴다면, 이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답고 복된 세상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8절에 보면,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지붕에 기와를 올리다 보니 지붕에 사람이 올라갈 수 없지만, 중동 지역의 집은 지붕이 평평한 구조로 옥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같은 경우는 정해놓고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고, 초대교회처럼 예배 장소로 사용하거나, 사람들이 모여 친교를 나누거나 쉬는 장소 등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건축 구조는 경사진 곳에 집을 건축하다 보니, 평평한 지붕이야말로 활동하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추락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으니, 반드시 난간을 설치해서 가족이나 이웃이 그곳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5. 그런데 8절 마지막에 보면, 사람이 떨어져 죽으면 그 피가 그 집안에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건축물의 안전성을 고려하지 않고 부실공사를 해서 사고가 나면, 그 집 주인에게 그 책임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건축물이라도 이웃의 생명에 위협적인 것은 살인에 해당하는 죄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의 음주운전이나 건축현장의 안전사고나, 사육하는 짐승이 사람을 상해하게 만들었을 때, 그 책임은 상해죄나 살인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불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속이지 않고 먼저 믿어줌으로 신뢰를 만들어 가는 마음, 미워하는 대신에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마음, 약한 자에게 다가가서 붙들어 주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더 아름답고 복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줄 믿습니다.

6. 계속해서 본문 서두에 나오는 21:22-23절의 말씀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에서 땅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대 사회에서 처형 방식은 죄인을 돌로 쳐서 죽이고 그 위에 돌무덤을 만드는 것인데, 그러나 극악한 흉악범에 대해서는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이방 나라의 경우에는 그냥 오랫동안 매달아 놓고 새들이 와서 뜯어 먹고, 풍화작용으로 소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매달려 저주를 받을 만큼 받았으니, 해가 지면 땅에 묻으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시체를 매단 채로 그냥 내버려 두면, 땅이 함께 저주를 받고 더럽힘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삶의 터전이 되도록 허락하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이나 짐승들과 모든 생물의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탐욕과 범죄가 이 땅을 오염시키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셨을 때, 그것은 단순히 약속이 성취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칼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잘 사용하면 생활의 도구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상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땅도 사람을 저주와 고통에 빠뜨리기도 하고 아름다움과 축복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땅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떤 마음이나 목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숭배를 물려받았고, 그 땅 사람들 처럼 폭력과 갈취와 교만과 사치로 배를 불리면서 하나님을 떠나자, 그 땅도 탄식하고 고통받았고, 나중에는 엉겅퀴와 가시로 그 땅 거민을 다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앗수르에 의한 북왕국의 멸망이었고, 바벨론에 의한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었습니다.

 

7. 그러므로 내가 사는 이 땅과 이 민족의 미래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조선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친일파와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가난과 학대, 차별을 받으면서 1916년 동경제국대학의 농학부에 들어가 일본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훌륭한 육종학자로 성장했습니다.

1950년 한국으로 돌아가서 9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을 위해 감자와 채소 과일 등을 부지런히 개량해서 배고픔의 일부를 해결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육종학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곳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올 수도 있고,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우상숭배하고 탐욕과 폭력으로 씨앗을 뿌린다면, 지금까지는 아무리 아름답고 비옥한 옥토라 해도, 머지않아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 되고, 사람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저주받은 땅이 될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물질 숭배 사상이 만연한 현대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생명을 경시하는 그런 풍조가 만연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16:26) 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 가운데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당연히 생명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생명 있음에 또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모른 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8. 일본만 해도 12천만 명이 사는 대국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에게는 참된 이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호시탐탐 우리의 약점을 엿보고 있다가 공격하고 비난하고 따돌리는 사람들은 있어도, 내 사정과 형편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이웃은 없습니다.

그래서 너나 없이 다 외롭고 가슴에 상처를 숨긴채 살아가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뿐입니다.

우리가 전도가 어렵다 안된다고 하지 말고, 이웃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못 본 체하지 말고 먼저 달려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면, 전도의 열매는 저절로 맺힐 것입니다.

본문 4절 마지막에 보면,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못 본 체하지 않고 달려가는 선한 사마리인된 이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려움 당한 이웃이나 그 소유된 생명을 볼 때, 반드시 가까이 다가가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줄 믿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웃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저주와 고통에 빠져 신음하는 이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못 본 체하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가서 그들을 일으켜 주고 세워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줄 때,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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