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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인생(마태복음27:27-32)
고영수 2025-04-05 추천 0 댓글 0 조회 12
[성경본문] 마태복음27:27-32 개역개정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십자가와 인생(마태복음27:27-32/2025.4.6.오전)

 

1. 기독교 신앙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살을 찢고 피흘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씻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삼으며, 또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영광을 우리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십자가를 통해 얻는 감사와 기쁨을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십자가는 언제부터 기독교 신앙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기록에 의하면, 고대로부터 여러 가지 모양의 십자가가 존재하였는데, 대체로 이방 종교의 상징으로 그 시작은 고대 바벨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들의 신인 담무스를 숭배할 때, 이 십자가 문양을 사용했는데, 그때는 십자가 모형이 아니라 영어의 T자로 생겼다고 합니다.

이것이 애굽, 앗수르, 로마로 전파되면서 고대 이집트에서는 그들이 숭배하는 여신의 손에 들려진 열쇠같이 생긴 모양의 물건도 십자가 문양의 한 형태였고, 이집트의 콥트교회는 이것을 자신들의 신앙 상징으로 삼고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로마에서는 이 십자가를 죄수들을 처형하는 형틀로 사용했으며, 그래서 예수님도 같은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스가 사용한 바람개비 모양의 상징도 십자가의 일종이었습니다.

 

2.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처음부터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그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오늘처럼 십자가를 묵상하거나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313년에 로마 역사상 기독교회에 첫 자유를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기원 431년에는 마침내 교회 안에서도 이 십자가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십자가의 형틀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셨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회사나 학교나 어떤 단체의 마크처럼 상징에 불과하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모든 인생에게 십자가는 무엇이며, 그 십자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십자가와 우리 인생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귀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3. 고대로부터 십자가의 형태가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십자가 없는 인생은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왕좌에 오르고 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면 인생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자리와 지위에 걸맞은 십자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결혼하면, 그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엘케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40대부터도 아니고, 20대부터도 아니다. 인생은 십자가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생의 존재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시작된다는 뜻이겠지만, 세속적으로 생각해 보면, 무엇에든지 맡은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다시 말해서 인생의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습니다. 당연히 그 십자가는 본인에게는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어렵고, 때로는 피눈물을 쏟아내야 하는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영적인 문제이든지 육신적인 문제이든지 철학자 키엘케골의 말대로 인생은 십자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4. 성경은 믿음을 지키는 과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전쟁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사도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벧전5:8) 디고 하였고, 사도바울은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6:11-13)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직장생활만 전쟁터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나 학원도 전쟁터입니다.

국가 간의 치열한 무역 싸움도 전쟁입니다. 이번에 미국의 대통령에 트럼프가 되면서 이 전쟁은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더욱 치열한 전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짐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자도 사냥에 실패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글은 겉으로 보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매일 먹이사슬로 이어지는,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으로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인간의 세계 역시 육신은 육신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남느냐 아니냐의 싸움이고, 이왕에 사는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치열한 싸움에 더하여,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인 싸움에서 천국과 지옥의 싸움이요,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입니다.

오죽하면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넘어뜨리려고 시험을 걸어왔는데, 그 마귀가 우리를 편하게 내버려둘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위해 용기 있게 나가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전신 갑주가 되고,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10:19)는 말씀대로 주님이 우리로 승리할 수 있도록 큰 능력과 권세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5.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제일 많이 싸우는 상대는 마귀도 세상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내 안에 뿌리내린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유혹하고, 그래서 의로운 일에 눈을 감게 만들고, 진리의 말씀에 귀를 막게 만들고 짐승 같은 마음으로 죄악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각자가 감당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가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삶의 무게만큼의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세계에서 내게 주어진 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이 문제는 관계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족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그들을 위해 가정의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질 수 있으며, 내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면 한목숨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은 것처럼, 이것은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어느 정도까지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는지는 내가 진 이 십자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원하지 않게 로마 군병에게 붙들려 예수님 대신에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아무 잘못도 없는 시몬으로서는 정말 억울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잠25:2-3절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하였으니, 모든 것이 우연한 것 같이 보이고, 때로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일을 꾸미는 것 같이 보여도, 그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6. 그렇다면 시몬이 억지로 진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많은 십자가가 있고, 너도나도 십자가를 진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서 정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복음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9:23)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매일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고, 또한 육체의 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치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이고, 부끄럽고 손해나는 일처럼 보여도, 억지로 진 십자가라도 이 십자가는 내가 사는 길이요, 영생을 얻는 길이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 하실 때,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원하시던 십자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랫동안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중압감에 몸부림치며 눈물 흘리며 통곡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십자가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향해 담대히 나아감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제단에 재물로 드렸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7. 구경꾼에 불과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진 십자가는 인생의 손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온 가족이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5:21절에 보면 이 시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알렉산더와 루포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낼 때,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6:13)고 하였는데, 이것은 시몬의 가족이 기독교 초기에 교회에 많은 믿음의 영향을 끼칠 정도로 헌신적인 가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시몬의 아내이며 루포의 어머니인 이 여인을 자신의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하고 헌신적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라도 하나님은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십자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십자가이지만, 그래서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되는 십자가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

토마스 아켐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원하는 자는 많아도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자는 많아도 그와 함께 고난받으려는 자는 없다.

그와 함께 기쁨 누리기를 원하는 자는 많아도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려는 자는 별로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길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영광과 축복은 내가 기쁜 마음으로 오늘 이 십자가를 질 때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8. 사람들은 눈앞에 나타난 현실만 믿으려 하고, 그래서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향해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40절에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외침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아니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고 성취할 수 없는 인류를 위한 구원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멀리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구경꾼처럼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하지 말고,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보시기 바랍니다.

대신해서 진 십자가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되고, 내 안에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고난의 십자가라고 생각했던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능력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인생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대신 짊어진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부터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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