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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갈릴리에서 만나요
고영수 2026-04-22 추천 0 댓글 0 조회 16
[성경본문] 마가복음16:6-7 개역개정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우리 갈릴리에서 만나요(마가복음 16:6-7/ 2026.4.5.오후)

 

1. 예수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두고 우리는 나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살리신 그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고 감사하며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신앙심이 매우 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난 주간에 이런 모습으로 지내며, 부활주일을 맞는 성도들의 모습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인의 종교적 영성은 큰 은혜를 입으면, 대가로 무엇인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고난을 묵상하고 자신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며 슬픔에 잠기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진정한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빈 무덤이 된 것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빈 무덤의 부활 현장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르던 여인들도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16:11,13,14).

도리어 부활의 증거인 이 빈 무덤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 20:15절에 보면, 동산지기 같은 이에게 시체를 숨겼거든 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시체를 돌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빈 무덤은 부활의 객관적인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만을 슬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이 불신하는 이유가 무었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것으로, 죽은 자의 장례를 끝내려고 했고, 빈 무덤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제자들도 부활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죽은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더라면, 그 빈 무덤을 보고 어떤 반응을 했겠습니까?

당연히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를 살리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빈 무덤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빠져 있었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한 말이 무었입니까?

7절에 보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라고 했는데, 이전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14:28, 26:32)는 이 말씀입니다.

본문 절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곳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과 제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빈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는 빈 무덤이 아니라, 이전에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사역하며 살았던 갈릴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평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의 약속을 믿었더라면, 빈 무덤 앞에 모일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3. 갈릴리는 예수님이 자라나시고, 공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셨고, 그래서 12명의 제자와 만났고,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갈릴 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빈 무덤을 찾은 것은, 죽어서 누워 있는 예수님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 이전에 하던 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들의 무덤을 찾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보면 감격도 흥분도 없고, 오직 쓸쓸한 추억이나 후회만 남는 그런 곳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인들과 나중에 찾아온 제자들도 빈 무덤의 현장에서 급히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부활 사건을 여러 번 듣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러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현장을 보고도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예수님이 평소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그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입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갈릴리는 예수님의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신 곳이요,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나 함께 사역하던 곳이었습니다.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이나 그 이후에도 늘 갈릴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삶의 현장이었고 천국 복음의 현장이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배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릴리를 기억하고 미리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찾아온 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24:5절에 보면,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것입니다.

굉장히 충격을 주는 책망이었습니다.

무덤을 찾았다는 것은 그들이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요, 주님의 약속을 잊었다는 증거요,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슬픔과 낙심에 빠져 말씀 가까이하지 못해서 영성이 캄캄해졌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찬송가 144장은, 한국인이 만든 가장 최초의 찬송가 가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곡은 근대 서양음악의 개척자인 김인식(1885~1962)이 작사하였고(1905), 그는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라는 학도가도 만들었고, 많은 찬송가의 가사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작곡자는,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돈 (William Howard Doane, 1832~1915)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가의 원문 가사를 보면, 내용이 너무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원문은 예수여 나를 십자가 가까이 두소서. 그곳에 고귀한 분수가 모두에게 거저 주는

치료의 시냇물이 갈보리로부터 흘러내리네.

한마디로 번역할 때 의역을 지나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인의 정서를 잘 살펴서 일부러 의역한 것이고, 그래서 한국인이 더 좋아하는 찬송이 되었던 것입니다.

 

6. 원래 한국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자동으로 그 자식은 죄인이 되는 풍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일이 다가오면 무조건 경건해져야 하고 죄인처럼 슬픔을 표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날 대신하여 십자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 앞에서, 그 끔찍한 죽음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찬송가 199장의 경우도 보면, 나의 사랑하는 책은,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은 어머니가 들려준 예수님의 고난을 듣고 어린 내가 흘린 눈물을 어머님이 닦아 주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찬송가가 심하게 의역이 된 것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함께 있지만, 대체로 한국인 정서에 잘 맞기 때문에, 그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날 위해 고생하시고 희생하셨는데, 나는 무엇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에 공덕을 쌓아야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두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굉장히 애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적어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기뻐해야 감격해야 할 것인데, 부활의 증거인 빈 무덤 앞에서 그들은 두려움과 놀람과 근심으로 가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 부활의 감격은 간곳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찾아야 할 곳은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였기 때문입니다.

 

7.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핵심이 빠져 있고, 열심을 낼수록 새 힘이 솟아야 하는데, 도리어 있는 힘도 빠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 신앙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처럼 오늘 우리도 이 빈 무덤에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 신앙은 온전한 것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의 핵심은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에 맞춰져 있습니다.

갈릴리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가는 곳이고, 갈릴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나중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5절에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내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이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고, 그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입고 부활을 소망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우리 믿음의 문제요, 결단하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이 부활의 사건을 기억나게 하는 사도바울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전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는 이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엇이며, 그 부활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지 못하면 말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체험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야고보의 말대로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8. 여인들이 빈 무덤을 찾아가면서 나눈 대화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발라야 하는데, 누가 그 무거운 돌을 옮겨 줄 것인가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돌을 굴려내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녀들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믿지 못하니 이미 굴러 열려버린 무덤이 닫혀있다고 생각하고 고민한 것입니다.

이미 해결된 문제를 놓고 서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 옆에 어떤 사람이 함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믿었더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빈 무덤에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불신앙은 우리를 고단하게 만들고 마음의 평안을 잃게 만들고, 삶의 의욕까지 꺾어 버립니다.

펜과 친구라는 뜻을 가진 펜팔은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는 것인데, 펜팔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개와 고양이가 서로 펜팔을 하다가 마침내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나가자마자 서로 실망하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고양이는 꼬리를 내리는 것이 반가움의 표시이고, 개는 꼬리를 세우고 흔드는 것이 좋아한다는 표시인데, 서로가 제일 싫어하는 사인을 보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님께 보내는 사인과 주님이 내게 보내시는 사인이 서로 다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빈 무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능력에, 의심에, 낙심과 근심으로 가득할 뿐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의 잘못된 함정에 빠져 고생하는데, 그 이유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은 쓸데없는 고민을 만들어 내지만, 부활의 능력을 받은 자는 빈 무덤을 찾지 않고 갈릴리로 가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뵈옵고,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입을 것입니다.

 

9.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던 불신앙의 돌들을 치우고 예수님을 만나서 부활의 능력을 입는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주어진 변화가 무엇입니까?

17-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빈 무덤을 떠나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초점을 빈 무덤이나 돌덩어리에 맞추다가 불신앙에 빠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삶의 현장으로 돌아갈 때, 그분을 통해 부활의 능력을 입고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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