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란
김성수
202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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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란 코란은 이슬람의 ‘경전’이다. 전 세계 수백만의 모슬렘들의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책이 코란이다. 이 코란에는 모하메드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말해 주었다는 계시들이 기록되어 있다. 코란은 모하메드의 수제자가 A. D. 650년경에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코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코레(Qor'e; 읽다)’와 어원이 같다.] 믿는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코란이 매우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영감으로 기록한 성경과 같은 말씀은 아니다. 사실 코란은 위험한 잘못된 견해들을 포함하고 있어 세상에 많은 해를 입히기도 한다. 반면에 코란은 모하메드가 7세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발견했던 부패에 대한 반발로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행하게도 모하메드는 주류인 서구 기독교나 정통 가톨릭조차도 직접 접해 보지 않았었고, 오히려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 도망해야 했던 비주류 이단적 종파들과 접촉만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유대인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코란이 얼마나 유대교와 기독교 관련 문제들을 많이 다루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에 대한 코란의 입장 코란 중에서 ‘아므람의 집(The House of Amram)’이라고 불리는 장인 ‘수라(Sura)’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부분이다. 이 수라장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알라가 진리의 책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책, 코란이여, 오 가브리엘 천사이시여, 토라와 신약을 일전에 우리 인간을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주시다니요!” 이 구절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코란이 모세의 율법서와 신약 성경을 신적인 계시에 의해 쓰여진 권위가 있는 책이라고 단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코란의 관점에서 신의 계시에 의해 기록된 책들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구약성경인 타나크, 둘째는 신약성경, 그리고 셋째는 코란이다. 모하메드가 자신을 천사 가브리엘의 세 번째 계시를 받은 마지막 전달자라고 본다는 점은 몰몬교의 조셉 스미스(Joseph Smith)가 자신이 성경을 완전케 하는 세 번째의 계시를 받은 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코란은 세 번째, 그러니까 마지막 완전한 계시를 이룬 진리의 책으로 세 책 중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모하메드가 신구약 성경의 영감을 인정한 것도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는 별로 실효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변명하는 바는, 성경의 각 책들이 더럽혀져서 오직 코란만이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코란을 주욱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오늘날 이슬람교가 이 코란 본문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분열 코란의 첫 장 17-18절에서 모하메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먼저 성경을 받기는 했어도 그들은 질투와 경쟁심 때문에 서로 멀어지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그가 그 당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이 분열은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이 판단은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데, 이 구절을 읽으며 내게 생각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예수께서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질투와 시기심에 의해 거절당하는 사건이다(막 15:10). 모하메드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과는 논쟁하지 말고 오직 알라에게 온전히 헌신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서 ‘온전한’ 헌신이라는 말의 어원은 히브리어의 ‘평화, 온전함’을 나타내는 단어와 같은데, 곧 히브리어 ‘샬롬’에 해당한다. 즉, 히브리어의 sh음이 아랍어의 s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슬람(Islam)이란 말과 샬롬(Shalom)이란 말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다. -아므람의 집 코란의 수라장 30절에서 모하메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노아, 아브라함, 아므람으로 족보가 이어지는 믿음의 사람들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다. 아므람은 원래 레위지파에 속한다. 그는 요게벳과 결혼하여 미리암과 아론과 모세를 낳은 사람이다(출 2:1, 6:20). 대부분의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아므람과 요게벳을 10인의 믿음의 조상 중의 한 사람으로 계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미리암과 아론, 모세와 같은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들을 낳은 사람들로서 기억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모하메드는 요게벳이 기도하며 어떻게 그의 아들을 주님의 종으로 드리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미리암이 태어났고, 요게벳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난 것에 놀라워했다. 그녀는 미리암을 주께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고, 그녀를 사탄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했다. 이 이야기에서 코란은 1,500년을 껑충 건너뛰어 신약의 시작으로 가고 있다. 미리암은 어른이 되어 제사장 스가랴(세례 요한의 아버지이며 엘리사벳의 남편)의 보호 아래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코란은 미리암이 성전에 있는 방에서 하나님에 의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33절). -예수의 탄생 그 다음 미리암은 인간의 모든 딸들보다 더 알라에 의해 선택되고 선별되었다고 말한다. 40절에서는 천사가 그녀에게 “미리암아 알라가 너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메시아인 예수께서 너의 태에서 태어날 것이며, 그는 이 세상에서 지극히 높은 자이며, 이제 올 세상에서는 알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 주고 갔다고 한다. 이 구절은 성경의 누가복음 1장 30-32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미리암(마리아의 히브리식 이름-역자 주)]아 무서워 말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라고 한 가브리엘 천사의 말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누가복음에서와 같이 그녀는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코란은 대답하기를 “알라는 그가 원하시면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고 그가 말씀하시면 무엇이든 존재할 수 있다”라고 한다. 모하메드는 여기서 한편으로는 미리암을 거룩한 ‘하나님의 어머니’로 묘사한 이교도 신학의 왜곡과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랍비 유대교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는데, 모하메드의 절충안이 어느 정도는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처녀를 통해 아이 하나 낳게 하실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반박하는 것도 매우 논리적이다. -예수와 토라 44절에서 모하메드는 예수가 “나는 너희에게 주어진 율법(토라)를 완성하러 왔으나, 금지되었던 것 중의 일부를 너희에게 허락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모하메드는 중세의 사제들과 랍비들 사이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 듯하다. 사제들이 모세의 율법과 관련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한 것과 랍비들이 율법을 부풀려서 일상의 모든 생활에 적용하여 실제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가톨릭과 유대교의 문제점들을 해결한다는 목적으로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절충안을 만들어 이슬람 교리를 만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선 예수 자신이 토라의 모든 율법을 지키셨던 것과 그분의 가르침이 모세의 율법과 전혀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모하메드의 말이 중세의 사제나 유대교의 랍비들보다 오히려 모세와 예수의 가르침에 더 부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45절에서는, 예수께서 믿음이 없는 자들을 꾸중하시면서 “누구든지 알라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촉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코란의 전형적인 실수들 중의 하나인, 토라의 사상을 주축으로 해 거기에 신약의 복음을 가미해 나름대로의 이론을 만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금송아지 우상 사건 후에 이 말을 한 사람은 사실 예수가 아니라 모세였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2:26). 그러나 모세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지 않으려면 “내게로 나아오라”고 촉구한 것과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분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게로 나아와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시는 것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 기독교 반유대주의가 되어, 유대인들이 주께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들을 저주하고 핍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유대인 선지자로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미리암과 미리암(마리아)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예수의 어머니 미리암(마리아)을 서로 혼동한 것 역시 모하메드의 성경 지식이 얼마나 표면적인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미리암과 마리아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다. 많은 유대 처녀들이 그들의 조상을 기려 사라나 레베카(리브가), 라헬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모세의 누나 미리암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예수의 어머니 미리암(마리아) 사이에는 그들의 영적인 역할이 유사하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세는 민족의 ‘구원자’ 아기로서 메시아의 예표이다. 모세와 예수 모두 악한 정치 권력자에 의해 그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들 두 미리암에게는 아기를 지키고 보호하는 영적 책임이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 미리암은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의 몸에서 아이가 나리라”고 한 예언을 이룬 여인이다. 그러나 유대교 랍비들은 언제나 이 예언을 가리켜 이사야 7장의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알마(almah)’로서 ‘동정녀’의 뜻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해 왔다. 그러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아기 모세를 지키고 있을 때, 출애굽기 2장 1-8절에서 ‘알마’라는 단어로 지칭되는데, 당시로는 처녀임이 분명해 이 단어가 처녀에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복음서의 미리암(마리아)은 이사야서의 ‘알마’와 모세의 누나 미리암의 ‘알마’에 대한 영적인 성취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다. -부활과 예수의 신성 수라장 48절에 보면, 알라가 예수에게 “내가 너를 이 세상에서 취해 높여서 나에게로 오게 하고 너를 부인하던 자들에게서 취하리라. 그리고 너를 따르는 자들은 너를 부인하던 자들 위에 높이리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도 모하메드가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유대인의 위치에 대해 타협안을 찾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수는 코란에서 비교적 구별된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코란은 수백 번이나 언급하고 있고, 이는 이슬람 교리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의 부활 사건이 누락된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부인하는 아주 의도적인 것이다. 52절을 보면, 코란은 “예수는 알라의 눈에는 첫 번 아담과 같이 흙에서 빚어진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예수를 긍정적으로 보는 코란의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신성을 엄격히 부인하는 코란의 한계이기도 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된 인간의 첫 시작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아담과 평행을 이루며, 신약에서 몇 번 언급되었다(고전 15:45). -책의 사람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책의 사람들’이라는 긍정적인 호칭으로 불린다(64, 68, 73절 등). 어느 정도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지식이 있는 사람들로서 존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슬람에서는 이러한 견해도 사라진 지 오래다. 모하메드는 “만일 우리가 책의 사람들 중 한 무리에게 은 천 디나를 준다면 그들은 그 돈을 모두 돌려줄 것이다. 그러나 한 디나의 돈을 또 다른 한 무리의 책의 사람들에게 준다면, 그들은 그 돈조차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68절). 여기서 모하메드가 비꼬는 것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대립이다. 양쪽 모두 돈을 나누어주고 빌려주는 것에 관한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를 향해 너희는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서로를 차별하는 추한 모습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모하메드는 여기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저 두 무리의 대립이 어떠하든간에 너희는 가장 기본적인 재정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들의 영적인 근원이 잘못된 것은 아니고, 일부는 여전히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있지만 그들의 대다수가 이미 타락했고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코란에는 아주 위험한 구절들이 있다. “개종하지 않는 자는 죽여도 좋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이 ‘이류’ 시민이 되어 이슬람의 규율에 복종하면 살려줄 수도 있지만, 이는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다른 코란의 구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이슬람의 신앙에 반대하면, 그들은 반드시 죽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중동에는 코란의 보다 강력한 강령이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기대했던 대로 아브라함은 코란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60절에서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닌 진정한 신자인 ‘하니프’로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 그리고 타나크(구약) 이사야서 51장 등과 유사하게 코란에서도 참된 신자가 되려면 아브라함의 자취를 좇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전형적인 문체로 코란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이삭과 야곱’에게 계시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78절).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스마엘에게 부여하는 중요성이다. 다른 구절에서는 이삭과 야곱은 언급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스마엘이 모하메드와 아랍 사람들 모두에게 더 인정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하메드는 자신의 믿음과 자기의 신은 족장들과 동일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코란에서는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상속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민족적 감성 이슬람이 아랍인들 사회에서 빠르게 확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 자신을 이스마엘과 동일시하는 관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민족적인 감성은 세대를 거듭해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 감성은 종교관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늘날 중동에서 민족간 갈등의 뿌리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와 관련해 범한 잘못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랍인은 유대인들로부터 지금까지 멸시를 당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족적 편견은 두려움과 미움을 두 민족 모두에게 가져다주었다. 미국에서 1960년대에 흑인들이 백인에 대항해 그들의 권리를 되찾기를 주장하면서부터 대다수의 흑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많은 흑인들이 그들의 삶에 자리잡은 세례를 백인들의 관습으로 생각해 거부하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적 자긍심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키지 못하도록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모른다. -성전을 옮김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는 메카의 카아바 성전이다. 코란의 몇몇 구절에는 이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보다 앞서는 원조 지성소로 묘사되고 있다. 90절을 보자. “인자를 위해 지어진, 그리고 발견된 첫 번째의 성전은 메카에 있는 것이다. 그곳은 축복의 근원지이며, 아브라함의 거룩한 곳이라는 확실한 징표가 있는 곳이다.” 이 생각은 모하메드로 하여금 성지를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옮기는 데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을 민족전승에 나타나 있다. 또한 이는 사막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던 유목민 아브라함의 문화적 배경과도 일치해서 유대인들보다는 아랍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동일시하기에 아주 적절한 이유가 된 것이었다. -비판과 인정 이어서 모하메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린다. 105절: “너희 책의 사람들은 의롭고 선한 일을 행하며, 악에서 돌이켜 알라를 믿는 동안에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나라였다. 오! 책의 사람들아, 너희가 믿음을 계속 지켰더라면 참으로 형통하였을 것이지만, 오늘날 믿는 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대개는 죄인이 되고 말았구나…”, 110절: “그들 중에는 여전히 주야로 알라의 징조를 살피며 예배하고 믿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의롭고 선한 일을 행하며, 악에서 돌이켜 선한 행실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자들이다.” 이 구절들은 한편으로는 인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코란 전체에 이러한 태도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표현되어 있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본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죄 코란의 인용들을 통해 우리는 이슬람의 종교적 뿌리가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이슬람은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험 요소가 되어 있다. 역사와 종교와 정치에 그들은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이슬람의 기원이 아주 엉뚱하다거나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명백한 잘못들을 고발하는 고소장과도 같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서로의 잘못을 비추어볼 수 있는 신비한 거울과 같은 존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자신을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을 전승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스라엘의 뿌리를 거부한 채 그들이 두 번째의 새 종교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러자 이슬람이 세 번째의 종교로 결성되어 기독교를 공박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반면 유대교는 이방 나라로 믿음이 확산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민족적 자만심에 빠져 그들 자신을 고립시켰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이방 민족을 제외하고 그들 유대인만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오류 가운데 있었다. 그리하여 이슬람이 민족적 편견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공박한 것이고, 아랍인이 이스마엘을 통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강조하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에 한 잘못을 다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하고,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잘못한 것을 다시 반복한 것이었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자, 이슬람이 교회를 ‘대체’한 것이다. 유대교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그들의 민족적 우월감을 내세우자, 이슬람이 유대교를 향해 자신들이 민족적으로 더 우월하고 정통하다고 주장하며 나선 것이다. 키이스 인트레이터 목사님의 <그 날이 속히 오리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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