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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코치를 떠도는 조선인 노동자의 영혼
김성수 2020-03-21 추천 1 댓글 0 조회 1289

 


 
 
[현장 취재] 카미코치를 떠도는 조선인 노동자의 영혼
 
  가마(釜)터널 속에서 지금도『어이, 어이』 하는 소리가 들린다
  
    
 『위험한 터널파기 공사에 특히 조선인 노동자가 많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日 지역 언론인 기쿠치 도시로)

도쿄전력회사가 업무를 인수했을 때, 이미 터널공사 관련 기록과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이국땅 첩첩산골에서 땅굴을 파며 혹독한 노동생활 끝에 허무하게 죽어간 조선인 희생자들이 존재했다.

이수경 在日교포 자유기고가〈skkyoto@hanmail.net〉  
  

 
으스스한 가마터널
 
 
<1927년경 개통 당시의 가마터널.>
 
 
 일본의 나가노(長野)현에는 매년 200만 명의 관광객이 붐비는, 카미코치(上高地)라는 경승지가 있다. 카미코치는 험난한 산악 지역을 즐기려는 등산가들, 원시림의 자연경관을 즐기려는 관광객들, 중요 동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카미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카미코치의 문지기라고 할 수 있는 가마(釜)터널이다.
  
  이 터널은 깨끗하고 정돈된 환경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취향과는 달리 의외로, 아주 비좁고 어둠침침하다. 지금도 일방통행으로 차량규제를 한다. 1927년경에 개통되었다고 하는 가마터널은 당시의 공사 기록이 일절 남아 있지 않다.
  
  기록을 중요하게 여겨서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기록으로 남겨 두는 일본 사람들이 불과 80년 전에 이뤄진 공사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당시 터널공사를 맡았던 회사가 지금의 도쿄전력회사에 업무를 인수인계 했을 때, 터널공사 관련 기록과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조선에서 건너온 많은 한국인 노동자의 죽음이 숨어 있었다.
  
  이국땅 첩첩산골에서 땅굴을 파며 혹독한 노동생활 끝에 허무하게 죽어간 조선인 희생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카미코치는 각종 규제가 심한 특별천연기념물 및 특별보호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유황 냄새를 뿜어 내는 에메랄드빛의 아즈사가와(梓川)가 흐르고, 3000m를 전후하는 웅장하고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카미코치의 대자연을 접하기 위해서는 까마득한 낭떠러의 산길을 거쳐야 한다.
  
  요즈음도 길 옆의 산 벼랑에서 돌이 떨어지고 눈 사태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이니 1920년대 개발 당시는 얼마나 불편했겠는지 쉽게 상상이 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 첩첩산골에서 관광지 개발 혹은 전력회사의 댐 공사에 투여된 노동자들 중에는 돈을 벌러 온 우리 동포들이 적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본토에서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 왕족·일본군 최고사령부·국가 주요기관을 나가노현의 마츠시로(松代) 산간지역으로 옮기려는 계획이 극비리에 진행됐다.
  
  
  조선 노동자 7000명이 새 대본영 건설에 참여
  
  일본 각지의 탄광이나 댐 건설, 군수공사 등에 강제 연행되어 왔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이 공사에 대거 투입됐다.
  
  대본영 공사에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가 7000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4000명은 13km 길이의 대규모 지하호 건설에 투입됐다. 이들 중에는 종군위안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마츠시로 대본영 공사를 벌이던 중 패전을 선언했다.
  
  당시 나가노현에는 여러 형태의 한국노동자들이 70여 지역에 분산되어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즈사가와(梓川) 주변 댐과 터널 등의 공사를 처음 담당한 곳은 「아즈사가와 전력」이었다. 이 회사는 카미코치의 산봉우리 중 비교적 낮은 편인 2393m의 야케다케(燒岳) 화산이 분화를 일으키며(1915년 6월6일) 분출해 낸 흙덩어리가 아즈사가와를 막아 버리자 건설공사용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가마터널 공사에 착수했다.
  
  카미코치가 있는 아즈미무라의 마을 연혁에 보면, 아즈사가와 전력회사 산하의 「카스미자와」 발전소의 「다이쇼이케」 제방이 1927년에 완공되었고, 1928년부터 발전소의 운전이 시작되었다.
  
  발전소가 1928년부터 운전되려면 이미 그 전에 가마터널이 개통되었어야 했다. 당시 개통된 가마터널의 사진이 몇 장 남아 있는데, 이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날짜가 3월21일로 되어 있다.
  
  가마터널의 개통연도가 1924~1925년경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터널이라 하지만 당시에는 겨우 인부들이 자재도구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자그마한 구멍이었다. 현재의 가마터널과 비교하면 작은 갱구에 불과했다.
  
  가마터널의 사진을 보면 한겨울에 터널이 개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카미코치 지역은 주변 도시의 기온이 38℃인 한여름에도 쌀쌀한 날씨이고, 카미코치를 흐르는 아즈사가와의 강물 속에서는 10초 이상 서 있기가 힘들 정도이다.
  
  비탈진 산이나 계곡의 낙석이나 산사태·폭설·빙판 등의 위험 때문에 지금도 매년 4월 말~11월 중순까지만 입산이 허락된다.
  
  이렇게 위험한 곳이기에 말도 쉽게 통하지 않고 低임금으로 혹독히 부릴 수 있는 식민지 한국인 노동자를 많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
  
  공사에 투입된 노동력의 규모는 어디서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도쿄 전력은 『아즈사가와 전력에서 추진했던 공사 규모 등에 관한 기록이 인수인계 시 없었다』고 밝혔다.
  
  
  터널공사 관련자의 증언
  
카미코치 근처 이네코키 댐의 다리 준공식(1936년).

  카미고치에는 가마터널과 관련한 여러 가지 괴담과 풍설이 나돌고 있다.
  
  차량통행이 적었던 옛날엔 『터널에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난다』, 『사람이 터널 속에서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터널공사에 직접 관련했었다는 카미코치의 사이토(72)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가마터널의 입구 옆길에서 조선인(한국인) 귀신이 나와서 사람을 데려간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터널을 뚫는다고 했지만 초기에는 제대로 된 공사도구도 없이 마구잡이로 굴을 팠다. 열악한 노동환경이었기에 공사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조선에서 온 노동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조선인 귀신」 이야기가 나왔을 텐데, 당시 죽은 조선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를 했나.
  
  『(시신을) 거둬 갈 사람도 없었을 테니 어딘가에 묻었을 것이다』
  
  ―그들의 묘를 본 적이 있는가.
  
  『본 적이 없다』
  
  그 후 그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달라고 몇 번이나 긴 편지와 반송용 봉투를 넣어 보냈으나 답장은 없었다.
  
  
  위험공사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들
  
카미코치의 전경(갓파바시).

  1956년경부터 그 지역의 지방신문인 「시나노마이니치(信濃每日)」의 기자로 활동하며 카미코치 관련 기사를 써 온 산악인이며 현재 시나노마이니치 신문의 감사역을 맡고 있는 기쿠치 도시로(菊池俊朗)씨는 이런 의견을 표시했다.
  
  『가마터널에서 「어이, 어이」 하고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공사에서 희생되어 터널 속에 매장된 조선인들의 소리라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가마터널은 오랫동안 시멘트 공사를 하지 않았다. 굳이 죽은 사람을 굴 속에 묻을 이유가 있겠는가』
  
  기쿠치씨는 카미코치 관련 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짧게나마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의 문장을 인용해 보자.
  
  〈공사기록에는 거의 없지만, 도쿄전력(아즈사가와 전력 이후에 인수인계를 받은 회사) 관계자는 『옆 갱구를 네 개 만들었으므로, 청부업자였던 아스카구미(飛鳥組)는 적어도 4공구로 나눠서 공사를 분담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터널 굴착을 하는 앞쪽에는 7~8명밖에 못 들어가니까 교대원이나 갱 속의 흙 등을 실어 나르는 반출용원 등, 1공구에서 50명 전후의 노동자가 있었다.
  
  이 밖에 발전소 본체 공사 등도 인해전술로 이루어졌던 당시 상황으로 봐서 적어도 400~500명의 노동자가 「사완도」에서 위쪽(카미코치 쪽)으로 공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과정에서 위험한 터널파기 공사에 특히 한국인 노동자가 많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가마터널」 시나노마이니치 신문사, 2001년, 38쪽)
  
  기쿠치씨는 「아즈사가와가 그토록 위험한 협곡인 데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곳의 공사와 관련한 사고 기록이 적다」고 기록했다.
  
  
  無사고·無사망 공사?
  
  아즈사가와 전력이 1936년에 완공한 사완도 발전소 공사에서 「無사고·無사망」이란 보고가 있지만, 역시 믿기 어렵다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기쿠치씨는 카미코치 주변을 공사하고, 가마터널의 개수공사도 두세 차례에 걸쳐서 관여했던 고바야시 건설회사의 고바야시 쇼이치(小林昌一)씨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도 조선(한국) 사람들을 많이 사용했지. 특히 굴파기는 절반 정도가 조선 사람으로, 2~3명의 우두머리가 있었지. 발파 같은 것은 익숙해서인지 능숙했었어. 가스미자와 공사를 맡았던 아스카구미(飛鳥組)도 꽤나 조선 사람들을 채용했을 거야. 굴파기는 사고가 많았었어.
  
  여기(이네코키) 마을 위에 「덴데장」이라는 연고자가 없는 저승사자를 모시는 곳이 있어. 여기에는 일본인을 포함해서 신원을 잘 모르는 희생자를 매장하고 있지. 간이묘지지만 비석만 몇십 개나 있었어. 여하튼 발전소 공사에는 각지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전게서, 39쪽)
  
  『조선인 사망자의 유골이 모셔진 「덴데장」을 관리하는 절(守桂寺)의 주지가 과거 명부를 조사해 신원을 확인한 유골을 1975년 이후에 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확인해 봤다.
  
  韓·日관계가 정상화된 지 10년이 경과된 1975년 무렵에 한국인들이 일본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식민지 시대의 강제연행을 규명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조선인 노동자 유골반환은 신빙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사완도」 지역에서는 수해 사고가 빈발하자 1935년 공양비를 세웠다.
  
  마을 문집에 기재된 내용에 의하면, 「공사 희생자들을 공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까지 수해에 휘말려 들어갔다」는 것이 공양비 건립의 동기였다.
  
  기쿠치씨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람들을 포함해 어둠 속에 묻힌 공사 희생자들의 존재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유령 이야기가 나오고, 공양탑이 세워지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조선인 유령」 이야기까지 전해 내려 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한 것이었나 추측할 수 있다.
  
  
  가마가부치(釜ヶ淵) 둑 공사
  
2005년 8월에 개통된 新가마터널.

  가마터널의 카미코치 측 출구 근처의 굴곡된 부근 아래로 흐르는 아즈사가와를 떠받치는 사방공사 둑을 가마가부치(釜ヶ淵)라고 한다. 이 사방둑은 1944년에 완성된 일본 최초의 아치형 사방둑이다.
  
  흘러내리는 모래흙 때문에 발전소 기능이 저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내무성)에서 1936년 가마가부치 둑 공사를 시작했다.
  
  이 제방공사에 한국 노동자들이 많이 동원됐음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방공장의 직원으로 「기수(기술자 아래의 직급)」 및 「기수 보좌」가 있었으며, 직원에 준해 「인부들 운전수」와 「인부(공정)」가 있었다. 직공으로는 「석공」과 「목수」가 있었고, 「인부」는 각 지방에서 온 응모자들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국내 노동력의 감소로 인해 조선(한국)에서 온 노동자를 많이 사용했고, 그 비율은 반수를 넘었다〉 (「호쿠리쿠」 건설공제회, 2002년 7월, 10쪽)
  
  이 제방공사에 한국 노동자들이 과반수 투입된 것에 비추어 볼 때, 바로 옆의 가마터널 확대공사나 주변 도로 정비 등에도 많은 한국 노동자들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의 건설비는 매년 3만 엔이었으며, 1936년에 공사 착공을 하여 1944년 준공까지의 8년간 총 공사비는 약 24만엔(현재 한국의 가치로 따지면 약 36억원 정도)이었다고 한다.
  
  
  원혼들을 위로해야 할 때
  
  당시로서는 큰 공사였다. 하지만 그 공사를 맡은 인부들의 숙소나 공사장 주변 시설을 위한 건설비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당시 인부들이 低임금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혹사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사방공사 및 가마터널 등의 공사에 투입된 노동자의 인원, 그들의 출신 지역 등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고용형태 계약조건이 드러나면 배상문제 등이 불거질 것에 대비해 기록을 은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측 관련자들이 양심적인 고백을 하거나, 한국이나 일본에 생존해 있을 당시의 피해자들이 증언하지 않는 한 구체적인 희생자의 규모를 추산하기 어려워 안타까움이 크다.
  
  정리가 잘 된 세계적 공원이라고 자랑하는 카미코치에는 이 지역을 서양에 소개했다는 웨스턴이란 인물의 기념비가 깔끔하게 세워져 있다. 그러나 공원과 그 주변의 인프라 건설에 깊이 관여했던 한국 노동자를 위한 기념비 혹은 추모비는 그 넓은 공원 어느 한구석에도 없다.
  
  값싼 노동력으로, 「내선일체」라는 명분으로 이국땅 첩첩 산골짜기에 끌려와 억울한 원혼이 된 이들의 영혼을 달래 주려는 움직임은 일지 않고 있다.
  
  얼마나 억울하고 恨(한)스런 삶이었으면, 유령으로 떠돌아 이곳 사람들의 전설이 되었을까?
  
  그들의 원혼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월간조선 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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