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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렇지요 - 신문기자 당신들
고영수 2022-08-28 추천 1 댓글 0 조회 941

그게 이렇지요

동아일보 김중배 세평

 

신문기자 당신들

 

19세기까지만 해도 신문의 기록을 신의 목소리로 들었던 목사가 있었던 것 같다. 남북전쟁 이전의 일이지만, 미국의 어떤 목사는 신문이 배달되면 의례 이웃들을 제치고 앞자라이 나섰다. "제발 먼저 좀 읽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그려내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사건을 정확하고 박력있게 기록하는 양심적인 신문기자는 신의 화신처럼 생각됐다.

신문을 만드는 쪽의 자부도 신의 섭리에 근거하고 있었다.

19세기의 미국이 낳은 최고의 신문편집자로 손꼽히는 찰스 더너는 뉴요크 선 지가 범죄기사를 크게 다르는 까닭을 이렇게 해명했다.

"신의 섭리가 허락한 일들을 보도하지 않을 수 있을만큼 우리는 위대하지 못하다".

그 미국의 19세기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건 오늘의 공산주의 세계이다.

나는 얼마전 외국지에 소개된 이른바 사미스다트의 줄거리를 읽고 새삼스러운 전율을 가누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대로 사미스다트는 소련에 나도는 지하출판물의 이름이다.

정확히 번역하면 자기 출판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사미스다트가 해외에서 인쇄되어 소련땅으로 되돌아가면, 타미스다트가 된다. 저쪽 출판물이라는 뜻이다.

외국지가 그 줄거리를 소개한 지하출판물의 제목은 거짓된 삶쯤으로 옮겨질만 하다.

아이까지 가진 모스크바의 여성기자 노라는 유방암에 걸려 병원에 수용된다.

여기까지는 솔제니친암병동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병동의 생활은 웅대한 필치의 솔제니친과는 달리 여성 특유의 섬세한 솜씨로 그려진다.

노라는 큰 병실에 함께 수용된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사회의 진실을 알게된다. 같은 병실에 수용된 환자들은 거의가 박해의 희생자들이었다.

그 가운데서 노라는 병을 고치고 퇴원한다. 병원을 나서 노라는 마침내 기자직을 그만두고 전형적인 소비에트인간인 남편과도 이혼해 버리고 만다.

모스크바의 여성기자 노라는 인형의 집의 노라와는 달리 거짓된 삶에서 뛰쳐 나온 셈이다.

그 줄거리를 소개한 의지는 친절하게도 사미스다트읽는 요령까지 충고해준다.

寓意가 많이 담겼으므로 行間不立의 문자를 읽어야 한다는 말을 사족으로 달았다.

신문의 기록을 신의 목소리처럼 믿는다는건 물론 옛날 이야기다.

신문기자를 신의 화신처럼 믿었던 한 때도 이젠 지나가버린 신화일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뚜렷한 징표는 자유로운 언론, 진실한 언론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공산주의와 맞서 우리가 지켜야 할 고귀한 가치의 큰 기둥도 자유롭고 진실한 생존과 함께, 자유롭고 진실한 언론이어야 한다는데 의심을 갖지 않는다.

그건 나 스스로가 언론에 종사한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최근 신문의 자유와 진실을 위해서 질타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 독자들의 목소리는 그 확연한 증거가 아니던가.

 

요즘 나는 신문의 신문다운 구실, 신문 기자의 신문기자다운 사명을 당부하는 독자들의 전화를 하루에도 몇통씩 받는다. 더러는 거리에서 만나서도 듣는다.

더러는 간곡한 사연의 편지를 적어 보내는 분도 있다.

그가운데서도 그냥 묻어버릴 수 없는건, 대구의 한 독자가 보낸 편지의 사연이다.

그분은 전신민당 총재 김영삼씨의 단식사태를 알게된 경위를 먼저 적었다.

그 분은 한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김영삼씨의 사진까지 외국지에 실렸다는 친구의 전언을 유언비어로 몰아세웠다고 고백한다. 잔잔하던 사연도 그 대목에 이르면, 사뭇 소용돌이친다.

단식사태에 의례 따라붙는 반달곰 기사와의 대조를 역설하고난 그분은 나를 이렇게 질타한다.

"언젠가 당신은 국회의원, 당신들이래서야 되겠느냐고 쓴 일이 있지요. 이제 나는 신문가지, 당신들이래서야 되겠느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찍이 각오는 무던히 되어 있었던 편이다. 그러나 막상 직격탄을 가슴에 맞고난 나는 하늘을 쳐다 볼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국회의원, 당신들을 썼던게 질타를 위한 질타의 뜻이 아니었듯이 그분 또한 질타를 위한 질타를 위해서 신문기자, 당신들을 외친건 아니라고 이해된다.

그분도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지켜야 할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간절한 충정을 그렇게 토로했음이 분명하다.

침묵하는 민중은 할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켰던 건 아니다. 침묵은 결코 無聲이 아니었다.

침묵은 오히려 大聲이었다. 이런 때 無聲은 오히려 大聲이라는 옛말이 떠오르는건 아픔을 더욱 저리게 할 뿌이다.

 

미심쩍거든 어미새와 품에 안긴 알들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겉모양은 죽은 알이나 산 알이나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부화의 생명이 피어나는 알을 평면 위에 놓으면 살아서 움직인다. 그 알의 목소리가 어미의 귀에 들리는건 당연하다.

그리고 때가 익으면 알은 깨어지고 새생명의 목소리가 땅위를 울린다.

나는 그 알의 통신을 신문기자로서의 좌우명으로 간직한다.

정지된 가운데서도 신문기자는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들리지 않는 가운데서도 울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흔히 국민적 통합을 말하지만, 그것 또한 진실의 말이 끊어지면 이루어질 수 없는 과녁이다.

진실의 말이 끊어지면, 참다운 관계도 끊어진다. 그날, 사회는 무관계의 모래알처럼 삭막해지게 마련이다.

나는 굳이 한 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조금은 장황하더라도 참아주기 바란다.

읽고 되새길만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국민화합은 체제가 고도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고, 국민 사이에 동질감이 형성되어 공동운명체로서의 연대의식이 있으며, 피차간에 국가 앞에서 균등한 봉사와 혜택을 받고 있다는 평등감과 애착이 있어야 이룩된다". 연세대학의 행정대학원장인 윤형섭 선생의 말이다.

그분은 국민적통합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정치적통합은 권력중심을 핵으로 삼는 제도적이고 기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한, 정치적통합은 그 수단으로서 강제보상 정보통제등을 동원한다고 못박는다.

국민적통합정치적통합을 현실적으로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냐에 의문이 가면서도 그 깊은 뜻만은 깊게 헤아려진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연대의식의 질긴 끈을 위해서 나는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귀한 가치인 진실의 교류를 덧붙여 두고 싶을 따름이다.

 

신문기자, 당신들의 외침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의 이유는, 물론 여러갈래로 분석될 수도 있다. 상황의 제약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중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신문은 신문기자가 만든다는 사실까지는 잊어버릴 수는 없다.

더구나 서로가 서로의 탓만을 찾고 있다간 백년하청의 꼴이된다.

서로가 나의 탓이라도 나서야 한다. 때문에 나는 나의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신문기자, 당신들의 질타를 소중한 채찍질로 간직하고자 한다.

그 질타를 받지 않아도 좋을만큰 우리가 떳떳해진 연후에도 진실의 교류가 여전히 희박하다면, 나는 당당하게 또다른 당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외적요인을 탓하려 한다.

당신들을 부르는 질타 우리 서로에게 없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숨김없는 충정이다.

 

1983618(토요일) 논설위원 김중배.

 

문득 파일함 속에서 발견된 40년 전의 신문기사인 이 세평이, 오늘 이 시대를 평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목회자인 나를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것도 같아서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에 필사를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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