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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먹는 자(마가복음14:12-26)
고영수 2020-06-10 추천 0 댓글 0 조회 321
[성경본문] 마가복음14:12-26 개역개정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나와 함께 먹는 자(마가복음14:12-26/2020.3.29.오전)


1.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일어난 현상 중에 하나가 마스크 대란입니다.
일본은 40% 정도의 인구가 화분 증에 시달리고 겨울의 독감이나 미세 먼지로 인해서 마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마스크를 구하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흘러넘치던 마스크가 어디를 가도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에도 마스크를 구할 길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수천, 수 만 장을 사 모아 인터넷을 통해 고가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를 국가가 금지하다 보니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마스크는 아주 싼 값에 팔고 있지만, 그 물건을 부치는 송료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어떤 젊은이는 자기 집에 가족이 사용할 마스크 6개월 치를 쌓아 놓은 것을 텔레비전 뉴스에 자랑삼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3월17일에 감동적인 뉴스가 있었습니다.
고후시(甲府市)에 사는 다끼모또(滝本)라는 중학교 1학년의 어린 소녀가 집에 있는 재봉틀로 마스크 6 백 장 만들어 시청에 기부를 하였는데, 그렇게 하게 된 동기는 고령의 노인들이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찾아다니시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지난 학기 말 테스트가 끝나자 하루 5시간 씩 30장을 만들었고, 전체 비용이 8만 엔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 비용은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고 모아두었던 세뱃돈이었다고 합니다.
시장은 그것을 받아 들고 크게 감동하였고, 그 마스크는 고령자 시설과 어린이 양호 시설에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비록 서투른 솜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앞으로 더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 여학생처럼 이웃의 고통을 내 문제로 생각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확산되고 있는 전염병으로 인해 세상에는 두 가지 뚜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염병이라는 어려운 일로 인해서 낙심 하고 무너지고 망가지고 약해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이런 고난을 도약의 기회로 삼고 자성의 기회로 삼아서 새로워지고 더욱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마땅합니까?
그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 해서 유월절 만찬을 나눌 장소와 음식을 준비하였고, 밤에 12 제자들이 다 모여 예수님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식구나 가족이라는 단어는 이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혈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식구라는 말은 한 집에서 살면서 같이 식사를 나누는 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것도 밥을 같이 먹어야 한 식구고 가족의 연대감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말이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정교육의 기본은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먹을 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도 이렇게 변했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식사 시간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신앙의 인격까지 함께 형성 되도록 노력하면 더 없이 복 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제목을 "나와 함께 먹는 자" 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3. 우리가 음식을 앞에 두고 함께 먹는다는 이 행위는 서로 간에 신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12 제자는 3년 동안 함께 살았고 함께 행동하였기 때문에, 서로는 가장 소중한 가족과 같았습니다. 그런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 가운데 배신자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식구가 된 가족은 무엇이든지 용서가 되지만, 이웃은 한 번 속상한 일을 만나면 용서가 잘 안 되고 마음이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하여도, 스승을 짐승이나 노예처럼 배신하여 팔아버리는 그런 행위를 알면서도 식탁에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일은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시41:9절에 보면,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던 아히도벨을 말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의 곁에서 지혜를 나누는 모략가였기 때문에 왕은 은밀한 이야기도 다 나눌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아들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즉시 왕을 버리고 압살롬 편에 서고 말았고, 그는 압살롬에게 나에게 군대 1만2천을 주면, 지금 당장 다윗을 추격하여 그를 쳐 죽이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니 거사는 수포로 돌아갈 것을 미리 알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삼하17장). 역사적으로 보면, 함께 먹는 사람들 중에 밀고자나 배신자들이 많았고, 그리고 그들의 나중은 비참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4.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제자들이 근심하면서 각각 나는 아니지요? 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왜 예수님이 만찬 석상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누가 배신자가 될 것인지 잘 아시면서도 함께 식사를 나누셨는데, 도중에 그렇게 불편한 말씀을 하신 이유는 12제자 모두가 예수님에게는 한 식구였고,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마지막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왜냐면 지금 가룟 유다가 계획하고 있는 이 일은, 너무나 큰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평소에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마귀는 그 욕심을 틈타서 그의 마음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원하는 것은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욕심도 생길 수 있고 남들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더 잘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욕심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욕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도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고 했습니다.
욕심의 결과는 죄의 대가로 찾아오는 저주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21절에서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앞 부분에 보면, "인자는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유다의 배신과는 관계없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에게 있어 사명의 길이요, 스스로가 택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의 발걸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온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5. 사실 예수님과 나누는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은 그 가운데 있는 배신자 유다로 말미암아 분위기가 살벌하고 망쳐질 뻔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전부 순수한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만찬이 감사와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식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가 아무리 작아도 그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매일 매 순간 그 문제에 집중하며 그것 때문에 다른 일상생활이나 계획까지 영향을 받게 될 때가 많습니다.
마치 가룟 유다 한 사람으로 인해 얼마든지 이 유월절 만찬이 엉망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사람들은 유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다른 11제자도 있었다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이 만찬을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셨기 때문에 26절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기쁨으로 찬양하며 만찬을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와 함께 먹는 자들 중에 배신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더 많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유월절 만찬은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내려오면서 거룩한 성찬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준다는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몸을 깨트리고 부서뜨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랑하는 그들을 살리되 영원토록 살리기 위함입니다.

6.그렇다면 그곳 만찬 석상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마시고 있었습니까?
본문 22, 24절을 보니 이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켜셨"(사53:6)다고 하였고, 사도바울도 이 사실을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갈1:4)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일 년에 몇 번 참여하는 성찬식은 연약한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 분의 말씀을 내 안에 우리 가운데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 생각과 내 고집에 사로잡혀 살았던 그런 삶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이제는 내 안을 그 분의 생명과 그 분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하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 (요6:56) 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수많은 세월을 통해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 된 사람이요, 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인 줄 믿습니다.

7.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며 십자가를 처음 대면하였을 때, 여러분은 어떤 감정, 어떤 생각을 가졌습니까?
지금까지 십자가에 대하여 한 번도 의심해 보거나 그것 때문에 불편하거나 나에게는 십자가 같은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거부반응이나 반감, 의심이 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아직 까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너무 모르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믿어왔는데 왜 그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십자가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고전1:23절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 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일수록 처음 십자가를 대하면 나타나는 반응이 말이 안된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고 생각하니 거부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의 반응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유대 땅을 지배하는 로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지상 최고의 왕국을 건설하는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그 메시아로 오신 예수는 현실적으로 보면 너무 초라하고 연약하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그런 말이나 하고 있으니 사실, 유다로서는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8. 그러나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며, 물로 포도주를 만들며 물 위로 걸어오시는 그런 능력을 보여준다고 해서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박해자 사울에서 전도자로 변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고백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내가 물질적으로나 무엇을 받거나 풍부함을 누린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 당하심을 통하여 그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찬식을 통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에 동참함으로 인하여, 그 분과 영원히 함께 먹고 마시는 자 가운데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식탁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과 함께 먹고 마실 때, 우리에게 임한 두려움과 고통은 물러가고, 근심 걱정도 사라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감사와 기쁨이 지금부터 영원히 이어지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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