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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가는 길(마가복음 15:1-15)
고영수 2020-07-18 추천 1 댓글 0 조회 30
[성경본문] 마가복음15:1-15 개역개정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십자가로 가는 길(마가복음 15:1-15/2020.7.19.오전)

1. 많은 사람들이 내일이라는 시간에 속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못해도 내일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늘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리라고.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들이 원하는 내일은 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에 대한 기대보다는 내일에 대한 기대가 더 크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보다는 내일에 대한 믿음이 더 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도할 시간이 없어도 내일은 기도할 수 있으며, 지금은 헌신하지 못해도 언젠가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주일성수를 못해도,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온전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그런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내일이 되면 이생의 삶이 끝이 나거나, 이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늘 못하는 것을 내일에 할 수 있고, 오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내일이 되었다고 갑자기 성실해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하지 않으면, 내 인생에 더 이상 기도할 시간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일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아궁이에 불도 때지 않고 굴뚝에 연기가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지 못하면, 오늘 내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지 못하면, 내일은 이런 일을 행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원하는 내일은 오지 않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베드로 처럼 몇 번이라도 실패를 반복해도 좋으니, 오늘 지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회개하지 않으면, 내일에 내가 받을 은혜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세월을 통해서 내일이라는 이 거짓말쟁이에게 속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 다시 속아 넘어간다면, 나는 정말 소망이 없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래서 다 실패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내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고통의 세월 속에서 방황하는 인생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수모를 당해야만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거나, 혹은 생각 이상으로 무능하고 어리석어서 이런 일을 당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말씀과 율례를 어겨서 징계를 당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내일이라는 거짓말쟁이에게 속아서 매일 죄 가운데서 부끄럽게 살고 있는 나를 위해서,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그래서 침묵하셨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사53:7) 던 것입니다.
그는 이같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며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것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고 어린양처럼 잠잠히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3.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절대로 이런 고난을 당해서도 안 되고, 더구나 말 한 마디 없이 잠잠하게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행하신 기적과 능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인들과 병자들을 위한 사랑과 자비와 치유의 능력을 어떻게 다 표현하고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당하신 후, 불과 33살에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셨는데, 정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절대로 당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히려 그 분에게는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면류관을 씌워 드려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임을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 분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있으며, 그런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으며, 고통과 저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영광으로 충만한 영원한 하늘나라 천국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4. 빌라도 총독의 심문으로 시작되는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3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발하고 그를 죽이려고 공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원래 재판을 하면, 살인강도로 현장에서 붙잡힌 죄인이라도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법적으로 보장을 받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처럼 우리도 죄 없이 억울하게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 때의 예수님의 침묵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하여 당황하고 낙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며 외쳤던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11:9) 라고 하면서 그를 반겼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기적과 능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예수님을 제자로서 따르지는 않아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의 행위가 도리어 기득권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에게 위기감과 두려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 법정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평소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모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거짓증언과 잘못된 내용으로 고발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공격에 한 마디의 변론이나 반박도 없이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체포 되어 결박당한 채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련하고 연약하고 무능해 보이는 모습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그 마음이 예수님에게서 돌아서고 말았을 것입니다.

5.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따르고 지지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고 소망을 주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침묵은 도리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말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첫째는 온갖 거짓 증언으로 공격하는 그들의 말은 답변할 가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수준이 비슷해야 대화가 되는데, 이 경우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변명하고 변호할수록 점점 더 비참해 질뿐입니다.
최근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잘못된 재판이 사방에서 반복되는 것을 보는데, 이전에는 죄를 지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도, 돈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돈이 없으면 없는 죄도 만들어 유죄를 선고 받았는데, 최근에는 이 사람이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이냐를 보고 죄의 유무가 갈리는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의로우신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둘째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힘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 크심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변호가 필요 없으셨던 것입니다.
셋째는 이런 수모와 고통을 통해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갑질을 하면 큰 낭패를 당하는 세상인데, 최근에 탤런트 이순재가 아랫사람에게 갑질을 했다고 억울하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는데, 예수님이야말로 종교적 기득권을 꽉 쥐고 있는 대제사장들의 모함으로 지금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을, 빌라도 총독이 허수아비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사실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로마 정권에 전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를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의 억울함이나 무죄를 호소하지 않으셨습니다.

6. 이 때, 재판이 상식적으로 진행되었다면 당연히 예수님은 무죄로 석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십자가로 나아가는 이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이 길 만이 죄 가운데 빠진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의 길을 위해서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신 이유는, 그가 자신의 생명보다 우리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셨고, 우리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전연 알지 못하는 대제사장 무리들은 혹시 예수님이 석방될지도 모를 그런 위험성을 배제하기 위해서 한 가지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6-8절의 내용입니다. 죄수 한 사람을 내세워 자신들의 요구를 따라 사면토록 함으로, 예수님이 풀려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운 자는 민란 중에 살인죄로 체포된 자들 중에 바라바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예수 바르 압바」 로, 마가는 예수님과 같은 이름으로 거론되는 것이 싫었던지 그냥 바라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총독이 제일 염려하는 것은, 무죄한 자가 죄도 없이 형벌을 받고, 죄인이 의인으로 바뀌어 석방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불만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빌라도가 총독의 역할을 잘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로마정권에 심어주게 되고, 이것은 출세에 지장이 되고, 노후에 안락한 생활에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간교한 대제사장들은 이런 사실을 미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풀려나지 못하도록 군중들로 하여금 강도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했고, 빌라도는 군중들의 힘에 눌려 죄인은 풀어주고, 죄 없는 예수님은 채찍질하여 끌고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의를 잃어버린 법정은 그야말로 도시 한 가운데의 시궁창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누가 정의를 짓밟고, 누가 사람들의 양심을 파괴하며, 어떤 사람들이 거짓말하는지 다 보고 계십니다.

7. 오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주저함 없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이 아무리 연약해도, 그 분을 향한 신앙고백은 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음을 증거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본에 신이라 불리는 것과 우상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객관적으로 우리보다 세력이 크고 힘이 강하다 해도,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행4:12)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사53:3-4)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53:5) 고 함으로, 그 분의 침묵과 고난과 온갖 수욕은 죄로 인하여 철저하게 망가지고 무너지고 저주가운데 갇혀 버린 우리를 살리고 치료하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8.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살아 움직이며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이 복음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를 실망시킬 수 없으며, 당연히 그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두 벌 옷도 가지지 않을 정도로 가난해 지신 예수님이지만, 부활의 영광을 얻으신 이후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며, 또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모든 환란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넉넉히 건지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실망치 말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하나님의 기쁨인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 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왜 이 세상에 오셔야 했으며, 그가 나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모든 사람 앞에서 간증하고, 전파함으로 살아 있는 믿음의 역사를 이어가는 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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