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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고난인가(마가복음15:16-27)
고영수 2020-07-25 추천 0 댓글 0 조회 497
[성경본문] 마가복음15:16-27 개역개정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누구를 위한 고난인가(마가복음15:16-27/2020.7.26.오전)

1. 하워드 켈리는 어린 나이에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집집마다 방문하며 물건을 팔았습니다.
어느 날, 배고프고 지친 나머지 한 집을 방문해서 물 한 잔을 부탁했고, 허기진 그를 본 이 집 아기씨는 그에게 커다란 컵 가득하게 우유를 따라 주었습니다.
소년은 감사하는 마음에 자신이 가진 10센트를 그녀에게 내밀었더니, 그녀는 어머니가 남에게 친절을 베푼 후에 보상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며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이 여인은 의사들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중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대도시의 전문병원에 보내졌고, 그 병이 매우 희귀한 병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마침 하워드 켈리가 이 환자를 담당이 되어, 환자의 주소와 이름을 보고서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마침내 그녀를 살려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최종 청구서를 환자가 아닌 자신에게 먼저 보내달라고 원무과에 요청했습니다.
문제는 오랜 시간 치료를 받다 보니 치료비가 엄청날 것이라 생각되었는데, 나중에 그녀가 받은 청구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의 우유 한 잔으로 지불이 완료되었습니다.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진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보답이요 헌신이었습니다.

2. 현대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관계가 메말라 가고 있는데, 유대인 철학자로 유명한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자신의 저서 「나와 너, I and You」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의 관계는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그것, I and It」 이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을 인격체를 가진 생명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저 사람이 필요하고,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웃음을 먼저 팔아야 하고,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동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이용해 먹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들의 대표적인 존재는 정치가들일 것입니다.
어쨌든 마틴 부버는 이러한 웃음을 가리켜 창녀의 웃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를 위해서 상대방을 수단화 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웃음이나 사랑이라도 그것이 수단이 되면, 그것은 부끄러움이라 했습니다.
한 마디로 현대문명 한 가운데에 살고 있는 우리를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속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인 우리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습니까?
앞 뒤, 그리고 옆 사람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무엇으로 보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롬14:15하)라고 하였습니다.

3.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당하신 온갖 희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등장하는 내용이 로마 군병들에 의한 예수님 희롱 사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원래 입었던 겉옷을 벗기고, 붉은 색의 망토를 걸치게 하고,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만든 면류관을 씌워서, 마치 로마 황제 앞에 선 군인들처럼 예수님을 향해 경례하며 평안을 빌었고, 또한 갈대를 가져다가 그것으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때로는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절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언 듯 보기에는 왕에게 예의를 갖추고 존경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가장 악질적인 희롱을 예수님에게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는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일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배신하였고, 그 다음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그를 버렸고, 이제는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이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34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도 십자가 위에서 고통하고 있는 아들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 때문에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셨고,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환영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과 5-6일 전만 해도, 온 예루살렘이 소란스러울 정도로 환영을 받았던 그 예수님이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예수님은 그 어디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셨고, 버림당하고 만 것입니다.

4. 사도 요한은 이렇게 버림 당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온 세상은 그 분이 만드시고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그 분의 뜻과 상관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1:11절에서 말하기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 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를 기쁨으로 맞이해 주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미워하고 배척하여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이렇게 대접해 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쓰기 싫어하는 면류관이 있다면, 예수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쓰고 있으면 있을수록, 흔들리지 않도록 깊이 쓰면 쓸수록, 가시는 살을 파고 들어가 혈관에 구멍을 내고, 그 피가 얼굴로 쏟아질 것이고, 그 때 느끼는 고통과 함께 사람들 앞에서 느끼는 수치심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조롱과 그 몸에 쏟아 붓는 온갖 고통과 멸시를 침묵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저와 여러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당할 고통과 수치를 아무 죄도 없으신 그 분이 대신 당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 오늘 우리를 위해서 끝까지 참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일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러워도 다 참을 수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상대방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본문에서 16-20절의 내용을 보면, "온 군대를 모으고", "가시관을 씌우고", "경례하며",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고", "끌고 나가니라" 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의 행동을 나타내는 이 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문장을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로마 군병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놀이 감이 되고 있으며, 마치 사나운 짐승들이 사냥한 먹이를 뜯어 먹기 전에 이리 저리 장난치고 희롱하는 그런 먹이감 처럼 취급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잠하셨고, 참으셨습니다.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사로잡혀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의 배경에는 우리가 간과해 버리기 쉬운 놀라운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들의 황제에 대한 경외와 경배를 풍자하여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악한 행동을 나중에는 진정한 경배와 찬양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서기 313년, 콘스탄틴 1세의 밀라도 칙령에 의해 로마제국은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쏟아 낸 온갖 멸시와 희롱이라도, 그 분은 선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이유는 처음부터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고칠 수 없는 악하고 더러운 마음도 다 고치시고 병든 육신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 자녀의 마음을 갖게 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문제는 지금도 이 세상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로마 군병들 처럼 조롱하고 편견을 갖고 멸시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 까지 다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 마음으로 다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6. 우리가 본문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실 때 만났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21절 단 한 구절이지만, 이 안에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몬은 아프리카의 구레네, 지금의 리비아 출신으로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에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왜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일 첫 번째 이유는 로마 군병들이 강제로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랜 시간 심문과 재판, 그리고 군병들에 의한 고난과 채찍질로 인해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서 계속 쓰러지는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야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때 시몬이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의 이유를 추측해 보면, 이 비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시몬의 가슴 속에는  내가 저 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어떤 강력한 동정심이나 연민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타인에 의한 강요로 인해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시몬은 예수님의 수치와 고난에 뛰어들어 그 분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하도 많이 듣고 배워서 이미 전문가가 되다 시피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십자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주일학교 어린이 수준이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뒤에 영광이 온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 이상, 인간으로서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그래서 이 고난 당하는 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들어드려야겠다는 그런 생각 뿐 이었을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계획하는 그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깔려 있는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면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마지못해서? 체면 때문에 억지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어떤 이익이나 목적 때문에?
정말 믿음을 따라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내가 마지못해 억지로 한 일이라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억지로라도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계산이 빠르고 매사에 신중한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인생의 챤스나, 혹은 축복의 기회를 놓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경우는 그런 상황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를 로마 군병들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것 때문에 나중에는 온 가족이 구원을 얻었고, 초대교회 시대에 온 가족이 십자가 복음을 위해 귀하게 쓰임을 받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21절의 알렉산더와 루포는 시몬의 아들들인데,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이름이 꽤나 알려진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롬16:13절에서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고 하면서, "그는 곧 내 어머니"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8.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침묵하시며 순한 어린양 처럼 행동하시니 그 분을 우습게 여기고, 그를 데려다 장난치며 희롱하였지만, 실상은 장난이나 치고 흉내나 내는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이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의 표현대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해"(벧전5:8)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고 우리 입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가정의 식구들을 전도하지 못하도록 온갖 궤계를 사용하고 가정을 불화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발이라도 물러서면 더 이상의 구원의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서서 여호수아의 승리처럼 마지막까지 힘써 싸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과 삶은 결코 장난이나 흉내가 아니라 생명을 건 영적 싸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때때로 내 마음에 들지 않고 기분이 나빠도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면, 생각지도 못한 생명의 길과 축복의 문이 열리는 줄 믿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는다 해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고, 예수님이 받은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해 예수님은 이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습니까?
이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때문에 우리가 살았음을 확신한다면, 이제 부터는 우리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우리의 이웃과 이 일본이 살아나야 할 때 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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