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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는(로마서3:19-24)
고영수 2022-02-12 추천 0 댓글 0 조회 1006
[성경본문] 로마서3:19-24 개역개정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그러나, 이제는(로마서3:19-24/2022.2.13.오전)

 

 

 

1.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년)는 매우 경건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덕분에 그의 철학적 사고는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도덕에 관하여 한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어느 빵 가게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빵을 사러 왔을 때, 주인은 그 아이에게 비싼 값으로 바가지를 씌워도 어린아이는 자신이 바가지를 쓴 사실도 모르니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의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도 정상적인 가격으로 빵을 팔았다면, 이 주인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빵 가게 주인은 정직하게 행동했지만, 실제는 그 어린아이와 정상적인 거래를 한 이유는, 자신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이고 그것 때문에 결국에는 장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거래, 즉 바가지를 씌우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빵 가게 주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정직한 것처럼 행동한 것이지, 정의나 도덕적인 가치관에 근거해서 행동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수퍼마켓에서 종업원이 물건을 정상적인 가격에 팔았다고 사람들이 그를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은, 그는 노동의 대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정의를 실현하고 도덕적인 가치관을 높이기 위해 그곳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의 행동보다는 그렇게 행동하게 된 동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미워만 해도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달이 되면, 한국은 대선을 치루게 됩니다. 

지난 5년 동안에 이 정권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능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는데, 이 정권이 국민들에게 약속하면서 내걸었던 슬로건이 무엇이었습니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들이 정말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국민을 속인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공정하거나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도리어 대한민국 사회를 평등 대신에 불화와 갈등으로, 정의로움 대신에 온갖 불법과 불평등으로 채우고 말았습니다.

 

2. 시간이 갈수록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으며, 이러한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며 죄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경계심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신앙도 점점 약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을 향해 내가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12:30-31절에 보면, 어느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기를,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장 큰 한 가지의 계명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은 물론, 가족 또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일, 아이치껜 이찌노미야시(愛知県一宮市)에서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7살의 어머니가 5살, 3살, 1살도 안된 세 딸을 죽이고 자신도 목에 칼을 그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영문도 모른채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본 무참한 집안 광경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어머니라서 안심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며 자신들을 지켜 주던 그 어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살인귀로 변해서 자녀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어간 어린아이들 또한 어떻겠습니까?

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은 내가 창조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가는 길이 달라지고,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 또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죄 가운데서 출생하였고, 또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판을 받아야 할만큼 죄로 말미암아 너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전도자를 통해서 찾아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가 무엇이며, 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악에 대한 판단은 물론이고, 올바른 도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축복이요 은혜인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율법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고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니 율법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였는데(출20:13-15), 왜 우리는 유대인도 아니면서 율법을 모르면서 이런 것을 큰 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는 성문화된 율법을 주셨다면, 이방인된 우리에게는 그 마음에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이 이런 것은 잘못된 행동이요 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있는데,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요, 도리어 19절에 보니, 율법은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만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말이 많습니다.

왜 하나님이라면서 이렇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몰라 주시는가? 이것은 너무 불공평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이 많습니다.

마치 자신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신은 늘 의롭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우리 인생에 생명도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고,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들은 내 힘으로는 하나도 지킬 수 없는 것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보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4. 제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제목을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정한 것은, 21절의 말씀에서 "이제는" 이라는 이 말씀이 킹제임스 번역에는 But now 라고 번역하고 있고, 이것을 일본어 성경에도, 「しかし、今は、」 즉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러나, 이제는」  이 말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의 구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대신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21절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바로 이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율법이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켜짐으로 이 땅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의를 일방적으로 공급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의는 세상에서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밝히기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의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버스나 열차를 시간에 맞춰 정한 장소에서 기다리면 당연히 목적지까지 우리를 태워다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에게 나타난 의, 곧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의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24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버스나 전차를 기다렸다가 올라타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분이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루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됩니다.

 

5. 오늘날의 미국, 아메리카 합중국을 이룬 가장 큰 힘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의 신앙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청교도들의 힘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죄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율법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무능하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 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고는 소망이 없는 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21절 말씀의 서두에 기록된,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세의 마틴 루터가 성경에서 벗어난 종교적 행위를 강요하면서 절대 권력으로 둔갑해 버린 그런 카톨릭 교회를 향해 어떻게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으로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도 미국과 유럽에서 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청교도들이 있었습니다.

죠지 휫필드, 요한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드, 로버트 머레이 멕케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19세기 무너져 가는 암흑시대에 십자가의 복음으로 사망의 어둠에 갇혀 고통하며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 주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은혜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위로부터 내리는 구원받은 자의 참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 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확신을 가지고 담대함으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이 말입니다.

 

6. 우리는 예외없이 과거에는 다 하나님을 떠났고, 세상 가운데서 죄를 물 마시듯 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죄 아래 갇혀 있으면서 그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를 성취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오직 내 육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기보다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오늘처럼 과거와는 전연 다른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마귀는 지금도 예배하는 우리를 찾아와서 너 따위가 어떻게 감히 그런 더러운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

지금까지 네가 지은 죄가 얼마인데 감히 너 따위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어?

이렇게 송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래 너의 모든 말은 틀림이 없어! 다 맞는 말이야! 나는 과거에 그렇게 살았어!

그러나 이제는 달라. 지금은 내 안에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들어와 계신다네. 그러므로 나는 그 분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은총을 누리면서 살고 있거든. 그러니 내 앞에서 꺼지고 두 번 다시 날 유혹하지 말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공격하고 수근거려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이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위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이미 우리도 그곳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의에 대하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웠던 나의 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두렵고 연약했던 내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벌써 죽었습니다.

이제는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로 말미암아 절망과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자는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또한 이미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요, 나는 벌써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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