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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아래에 있는 인생(로마서3:9-20)
고영수 2022-02-05 추천 0 댓글 0 조회 776
[성경본문] 로마서3:9-20 개역개정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죄 아래에 있는 인생(로마서3:9-20/2022.2.6.오전)

 

1. 한국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는, 공부를 못하면 집안이 가난한 것을 탓하고, 출세를 못하면 연줄이 없는 것을 탓하고, 가난은 조상 탓이라니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가끔 흉악한 살인범이 세간의 동정을 받는 이유는, 그가 조실부모(早失父母)하거나 계모의 학대를 못 이겨 집을 나와 떠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동정심으로 변하고, 운전기사가 졸면서 운전하다 대형사고를 내어도, 어린 자식의 병원비를 대느라 밤샘 작업을 했더니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도리어 사고를 낸 사람을 동정하고 용서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이런 의식이 자신의 잘못을 다른 곳에 전가하려고 하는 심리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정치 세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인생들을 보면,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표본입니다.

남이 잘못한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생명을 걸고 달려 들어 그것을 빌미로 삼아 상대방을 파멸로 몰아가지만, 정작 제 잘못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고, 그런 일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것은 너무 유치하고 치졸하다면서 도리어 상대방을 몰아붙이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데, 오늘도 대선판에 뛰어든 사람들과 그들 곁에 붙어서 기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죄의식이 없는 것인지 도덕 불감증인지, 조상을 잘못 만난 탓인지 태어나지 말아야 할 땅에서 태어난 탓인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2. 제가 코로나 펜더믹을 겪으면서,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날 때, 힘있고 소망이 넘치는 아침을 맞아야 하는데, 이런 몸으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앞설 때가 많습니다.

밤새 쉼을 얻었으면 당연히 상쾌한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육체가 점점 쇠약해지고 여기저기 망가지고 불편한 곳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래서 제 몸이라도 사랑스럽기 보다는 한심스럽고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우리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너무 험악하고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참 불쌍하고, 구차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현실에서 인간이나 짐승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비관론이 아니라, 인생으로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그런현실에서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수많은 고통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이런 고통에서 구원받고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에서 인류를 향해 사도바울이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모든 인생은 예외 없이 다 죄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다는 이 말은, 우리 인생이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뜻이고,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택함받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아담을 통해 죄의 유전을 받아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신분의 변화를 이룬 우리도 이 육신을 벗어버리지 않는 이상에는 결코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10절에 보니, 이 세상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3.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하는 유대인 가운데도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독교인이라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임종예배를 위해 급히 차를 몰고 가시는데, 앞에 가는 차가 너무 천천히 달리다 보니 위험을 감수하고 앞질러 가다가 하마터면 앞차와 사고를 일으킬 뻔했습니다.

그러자 그 차가 따라오면서 계속 크락숀을 누르며 서라고 재촉해서 갓길에 세우고, 쫓아오는 운전자에게 사과를 하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쌍욕을 하면서 분노심을 가지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올려다보았더니 그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의 안수집사였다고 합니다.

서로가 너무 놀라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그 집사님은 자신의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서 아예 멀리 이사를 하였고, 교회도 그날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자기의 급한 마음에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을 시험들게 했다고 자책하면서 회개하고 그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의 말씀은, 시14:1과 53:1에 나오는 똑같은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인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오낮 악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죄 아래에 있는 자들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마음으로는, 깨달음이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진리와 지혜를 만나도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한쪽으로 치우쳐 다 무익한 자가 되었고, 선행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가 아는 지식이 세상 전부입니다.

그래서 남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고집을 꺽지 않으며, 결국 그것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바로 왕의 마음이 얼마나 고집이 세고 변덕이 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과 변덕스런 마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히브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꺽지도 못하고, 도리어 바로의 고집이 온 애굽을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의 언어는 어떻습니까?

이웃을 향해 그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고, 그래서 입만 열면 사람을 속이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으로 가득하여, 이웃을 향해 입으로 온갖 저주와 악독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말하는 이 독은 헬라어로 아스피스로 이것은 이집트 사막에 살고 있는 코브라의 독을 말하는데 그 단어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호홉을 통해서 이웃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그것이 상대방의 생명과 건강을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있는 것을 볼 때, 13,14절의 말씀은 이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독으로 세상을 고통하게 만들고 환경을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만나는 인생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파멸은 산산히 부숴지는 것을 의미하고, 고생은 비참함과 고통을 말하는데, 이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9절에도 보면,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 라는 것입니다.

 

5. 죄송한 이야기지만, 여성들이 화장하면 얼굴의 표정을 어느 정도 감출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문화나 유행이라는 것이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일시적으로 감추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그럭저럭 살만하고 행복을 누릴 기회도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죄 아래 있는 인생들의 삶은 비참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문제점은 노아의 시대나 소돔 성처럼 죄가 관영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와 오점이 무엇입니까?

18절에,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는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죄 아래에 있는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의 주권자요 창조주이신데 그런 분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는 것은 간이 부은 정도가 아니라 배 바깥으로 나왔다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교만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어리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 죄로 인하여 무너지고 부패하는 인간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인생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6.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주어진 십자가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롬1:16)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또한 1:17절에 보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하였습니다.

비록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예외없이 죄 아래 눌리고 갇혀 있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에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을 행하거나 우리의 의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을 쳐 주셨기 때문에, 죄로 인한 재앙과 심판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그것은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상대적인 의로움이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절대적인 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행한 일을 가지고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다 죄아래 있다는 것과, 그래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축복의 자녀로 삼으시고, 오늘 우리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7. 그렇다면 이와같이 용서받고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막8:36-37절에 보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고 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되어서 천하를 호령한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감옥으로 간다면 지난 날의 대통령의 영광이 다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면서, 지난 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죄아래에 있는 비참함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서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먼저 믿는 믿음의 사람인 우리들의 할 일이고, 하나님은 이곳 일본 땅의 1억2천 7백만을 구원하라고 우리를 이곳에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죄로 망가지고 부패한 육체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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