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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로마서10:5-10)
고영수 2022-10-29 추천 0 댓글 0 조회 692
[성경본문] 로마서10:5-10 개역개정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신앙고백(로마서10:5-10/2022.10.30.오전)

 

1. 위가 나쁜 사람은 위에 해로운 음식만 찾는다고 합니다. 가렵다고 자꾸 환부를 긁으면 질병을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성에 강하게 끌리는 사람은 죄짓는 일만 찾아다니면서 그 죄 때문에 자신이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죄 가운데 빠져서 그 죄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불행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이고, 이 죄가 내게 오는 좋은 것을 다 막아버리고, 죄가 사람을 더 어리석고 더 연약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만 가지려는 욕심 많은 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옷을 입으려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디자이너를 불러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디자이너는 생각하기를, 아 임금님이 병들었구나 생각하고, 어쨌든 왕의 품을 제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린 후에 다시 임금을 찾아왔는데, 임금은 빈손으로 찾아온 디자이너에게 새로 만들어 온 옷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옷은 죄 많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성자나 현자에게만 보인다고 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옷을 보여주었더니, 임금은 아이고! 이렇게 좋은 옷을 만들어 왔구나! 감탄하면서 신하들을 불러서 보여주었더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쏟아내고 감탄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이렇게 좋은 옷을 백성에게도 보여주어야겠다고 하면서 왕궁을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도 성자나 현자에게만 보이는 옷이라는 소리에 저마다 잘난척 하면서 임금이 입은 옷을 칭찬했습니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군중 속에서 튀어나와서 하는 말이, 우리 임금님이 발가벗었네! 하더랍니다.

 

2.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진실을 잃어버리고 거짓되고 위장된 삶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런 세상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선생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동성애를 가리키고, 소아성애자들이 어린아이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을 차별금지법으로 보호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추악한 반인류적인 범죄를 범죄가 되지 않게 하려고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성평등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좌파 정권이 낳은 산물입니다. 이제는 법이 정의의 편에 서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과 악의 편에서 나라와 민족을 무너뜨리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는 성적인 타락이요 음란함이었습니다. 이런 죄로 인하여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는 곳이 가정이고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소돔성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유황불에 무너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며칠 전, 일본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등교하지 않는 학생들이 무려 245천명이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폭력과 왕따가 넘쳐나고 선생님들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이대로 가면, 10~20년 안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세상이 변할 것입니다.

교회도 지금까지는 전도와 양육을 통해서 부흥하고 세상을 변화시켜왔지만,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서 코로나로 문 닫은 교회가 9천이 넘었다고 하고, 한국 교회에서 120만명의 신자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장로교회 신자는 55만명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신앙과 내 가정은 내가 지키는 것이지 남이 지켜 주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내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3.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고민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도달한 결론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즘 교회 안에 넘치는 고민도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어리석은 말에 좌우로 잘 흔들리고, 어떻게 내 신앙을 지켜야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과는 정 반대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자기 의를 앞세우다 보니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안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며 그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런 사실을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에는 누구든지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결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게 되면,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그리스도와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지만, 내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신앙은 훈련이 아니라 마음속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음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 세상에는 실패하는 일이 많은데,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처럼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장에 가면 상품들 특히 식품에 관해서는 유통기한에 대하여 매우 엄격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믿음에서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내려 주신 만나에도 유통기한이 있었습니다. 그 기한이 지나면 만나 속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버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도 유통기한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4)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마치 스마트폰 시대에 전화도 없이 전보로 정보를 주고받았던 그런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유통기한이 끝난 율법을 붙들고 씨름하는 이스라엘은, 그래서 그들이 열심을 내면 낼수록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가 2014년에 산상수훈을 출판할 때, 전도용으로 사용하려고, 그래서 그 내용을 굉장히 쉽게 기록했습니다. 그 머리말에 보면, 이 산상수훈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손에 의해 부서짐으로 그것이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혼자서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그 고통스러운 삶 속으로 주님이 들어오심으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절망을 통해서 새로운 빛이 보이고, 무릎을 꿇으면서 참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팔복의 한 구절도 받아들일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산상수훈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로 오염된 인간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보내신 것입니다.

 

5. 그렇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본문 9절의 말씀입니다.

첫째는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는 것과, 둘째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임을 당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부활의 사건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13절에 보면, 율법은 듣는 자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하였으니, 이스라엘 가운데 한 사람도 지키지 못했던 이 율법을 과연 누가 지킬 수 있으며, 누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거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새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아무리 연약하고 불쌍한 인생이라도, 아무리 죄가 많은 자라도, 자기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 신앙고백만 할 수만 있다면, 다 구원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 집에 갔더니 엄청난 분량의 장서를 보았는데, 그 가운데는 문학도서가 많이 있었는데, 제 눈에는 그것들이 보물처럼 빛나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책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자랑만 했지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교 1학년 들어갔을 때, 어느 선배가 자기 집으로 제 친구들과 함께 초대했는데, 방 하나 가득 사상계라는 잡지가 칸칸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잡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따뜻한 봄 날씨에도 방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그 책에는 손도 못 대게 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이 사람들은 율법은 하나도 지키지 못하면서 그 율법을 온 세상에 자랑하던 이스라엘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6. 문제는 어떻게 하면 환란 가운데서도 내 믿음을 지킬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믿음의 생활을 잘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9절의 말씀대로 내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는 신조(Creed, Symbol)나 신앙고백서(Confession)이나, 요리문답(Catechism)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을 양육하고, 이단으로부터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것들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이라는 신앙고백은 2세기쯤에 나타났다가 4세기 쯤에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5세기에 와서 오늘날의 사도신경의 형태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든 신조나 고백들은 본문의 말씀대로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고백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10:32-33)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으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고백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며 죽은 것이고,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지식일 뿐입니다.

열심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고, 열심으로 신앙을 완성시키려는 생각은 율법주의자들의 소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확신이 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랑의 고백이 없거나 믿는 것들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7. 남녀 사이에서도 사랑이 없이는 고백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왜 입술로 고백하기를 주저합니까?

하나님은 죄로 멸망할 날 위해 누구를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분은 날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하여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사랑하는 신랑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행위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걸음걸음 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한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의 이런 사랑의 고백이 우리 신앙을 더욱 아름답고 힘있게 만들어 가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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