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태복음27:32-4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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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마태복음27:32-44/2024.3.24.오전)
1. 기원 385년,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수도원에 한 노인이 초보 수도사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채소밭을 가꾸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디든지 말단으로 들어가면 힘이 들지만, 이 노인은 묵묵히 맡은 일들을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수도원을 방문한 이집트에서 온 젊은 수도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채소밭에서 일하고 있던 이 노인을 알아보고 감격스런 목소리로 아버지 피누피우스여 하면서 땅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알고보니 이 노인은 이집트를 대표하는 대수도원 원장으로 그 명성이 대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다름아닌 이 노인과 함께 방을 쓰던 죤 카시안과 게르마누스 라는 젊은 수도사들이었습니다.
피누피우스는 수도원 원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며 살다가는 자신이 원하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닮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수도원을 도망 나와 위장하고 다른 수도원에 초보 수도사로 들어갔지만, 번번이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여러 번 실패한 후에 할 수 없이 이집트를 떠나 먼 베들레헴까지 도망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사방으로 찾고 있던 제자들에게 붙잡혀 다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붙들려 울면서 돌아가는 그 노인을 보면서 같은 방을 쓰던 젊은 수도사 죤 카시안은 생각하기를, 이집트 사막에 가면 여기서는 얻을 수 없는 영성에 관한 어떤 비결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베들레헴을 떠났고, 그는 이집트 사막에서 7년 동안 훌륭한 교부들 밑에서 금욕주의로 훈련을 받다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프랑스의 마르셀레스에 정착하여 그곳의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죤 카시안을 가리켜 기독교 영성에 관해서는 칼빈과 같은 존재라고 일컬었고. 그는 서방교회와 수도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수도원의 영성은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죤 카시안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처음에는 온갖 다양함에서 시작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나가 되고 지극히 단순해진다는 것이고, 어지러움에서 고요함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지난 주간에 미국 야구 메이저 리그의 오픈전이 한국 서울에서 열렸고, 여기에 다저스로 이적한 오오다니 쇼헤이(大谷翔平)가 출전하여 이곳 일본에서도 그 열풍이 뜨거웠는데, 도중에 오다니의 통역사의 도박문제는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아직도 진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통역사 미즈하라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도박중독자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지금까지 도박에 메어 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누구라도 돈에 욕심이 나서 돈에 매이면 돈밖에 모르는 인생이 됩니다.
도박에 미친 인생은 도박이 인생의 전부인 줄 착각하다가 이처럼 패가망신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성에 메이고 성욕에 메이고 향락에 매이면 앞으로 남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인가 옳지 못한 것에 한 번 메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꿈이 사라지고 미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예에게는 소유도 꿈도 소망도 미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노예처럼 매여 버린 이런 비참한 인생을 살면서도, 자신은 꿈이 있고 미래가 있으며 자신의 삶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은 마음으로 살고, 그래서 온갖 몸부림을 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을 얻었고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했습니까?
만일 그렇다 하여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눅16장의 부자처럼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는 지옥의 불꽃 가운데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제 생명을 사랑하면 사랑한 만큼, 제 생명을 소중이 여기면 소중히 여긴 만큼, 사람들은 더 많은 죄와 허물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래서 제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생명을 영원히 잃고 마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나 잘못된 것에 영영 묶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순교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그들을 묶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에 대한 온갖 협박과 고통과 감언이설로 묶이지 않았고 속임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돈이나 향락이나 명예나 그 어떤 세상적인 보화에도 묶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잠시 후에는 또다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생에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오늘 우리가 수많은 유혹과 정욕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묶이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생명이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명이 귀중한 만큼 그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우리도 생명이 귀중한 만큼 이 생명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 생명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제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그 방법과 목적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4. 오늘 본문을 읽으며 제가 가슴이 너무 아픈 것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 예수님을 향해 온갖 말로 비난하고 멸시하는 군중들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던진 말이 무엇입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40) 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42) 고 하였고,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42) 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 이들은 잘못된 가치관에 묶인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내려오면 우리가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겠다는 바로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 했으며, 왜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통과 저주의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당할 사망의 온갖 고통과 저주와 죽음을 그가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들이 헛소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우리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마구간에서 나셨고, 평생을 한 벌의 옷으로 만족하셨고(눅3:1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하셨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모든 대적을 이기고, 실패도 없고 고통도 없이 원하는 것을 쉽게 이루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원수가 십자가에 자신을 못을 박으면 보란 듯이 그곳에서 내려와야 하고, 뭔가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인 것을 보여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사람들은 교회라면 당연히 축복받고 성장하고 부흥하고, 온갖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야 그곳이 진정한 예수님의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만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요 성도의 모습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5. 우리가 예수님의 일생을 주목해 보면 그는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나타나는 수도 없는 기적과 능력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시험 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0일을 굶주렸고 그때 마귀는 돌로 떡을 만들어 너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우라고 했습니다.
마귀도 예수님에게는 이런 정도의 능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고 하시면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기도하실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칼을 들고 저항하는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고 하시면서,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은 전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순순히 붙잡혀서 불법적인 재판을 받으시면서도 침묵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 가운데 계신 것은, 그분이 너무 무능하고 못났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조롱하는 말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어떤 기적과 능력을 보거나 체험한다고 믿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누구도 믿음을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도 그들이 믿을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6.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요,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고, 죄로 인하여 온갖 저주와 고통 속에서 소망 없이 죽어가며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되었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축복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지셨고,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능력이나 권세도 사용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무능한 존재로 보인 것은 우리를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이 멍텅구리 같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에서 함께 예수님을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있었으니, 과연 그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소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시대나 지금 이 시대나 영적인 수준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요즘 생각보다 교회 안에 가짜가 많고, 엉터리도 많고, 밥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결코, 세상 때문에 잘못된 것에 메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주와 더불어 사는 것인 줄 믿습니다.
8.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방법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만일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통해 이 땅에 온 인간이라면, 그에게는 남을 구원할 그 어떤 능력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더라면 인류의 구원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고,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십자가 밑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42) 는 이 말 그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셨고, 자신은 죽음과 저주에 갇혀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43) 고 말한 그대로,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은 그를 삼일 만에 사망에서 건져 올리셨고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하셨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놓고,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고,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인생이 나아가는 길이 다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는 이 말씀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구원하셨고,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바라보도록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으니, 우리는 세상에 았는 그 어떤 것에도 메이지 않고 지금부터 영원토록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감사요 소망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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