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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없는 구원의 역사(로마서11:11-15)
고영수 2024-05-25 추천 0 댓글 0 조회 275
[성경본문] 로마서11:11-15 개역개정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공: 대한성서공회

중단없는 구원의 역사(로마서11:11-15/2024.5.26.오전)

 

1.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그곳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움과 축복이 기다린 것이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들의 시달림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조상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의 땅이라는 기대감이 컸는데 실상은 고통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실수였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가나안 사람들의 유혹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우상까지 다 멸하라고 하였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을 죽이거나 쫓아내는 것이 아까웠고 그들이 가진 지식이나 소유나 문명이 탐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남겨 두었고, 남겨 둔 그들과 협상하고 타협하고 혼인을 맺음으로 가나안 족속은 오랜 세월 이스라엘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광을 누릴 기회가 왔지만, 그들은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욕심에 끌려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택함으로 죄악에 대한 심판을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었고,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죄와 고통에 빠진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에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는 차질을 일으키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놓고 사도바울은 두 가지의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으로 인하여 이방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둘째가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유대인에게 새로운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 기회를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방편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임시방편도 아닌, 만세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49:6절에 보면,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하였고, 또한 호2:23절에도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선민 의식이 강했던 이스라엘에게 이방인은 개나 돼지로 취급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복음을 거부한 이스라엘에게 시기심과 질투심이 일어날만큼 구원받은 이방인을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시고 자녀 삼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이방인의 구원을 가리켜 풍성함과 충만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3. 마치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녀로 인해 부모가 계획하는 사업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이것이야말로 이방인된 우리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축복이고 영광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무런 자격도 없는 이방인된 우리에게 이렇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넘치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통해 사도바울이 밝히고 있는 두 번째 이유인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이 이번에는 우리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 자녀의 자리를 회복하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고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거역함과 거부와 불신앙을 도리어 이방인 가운데서 더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약하고 부족한 것이 많으니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도움이 안된다고 자신을 비하하거나 숨어버리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옳은 길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넘어지기까지 한 이스라엘 조차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이런 연약함을 사용하여 오늘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하고 부족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한 번 실패하거나 미운털이 한 번 박히게 되면 관계를 회복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잘못된 것도 선한 열매를 맺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4.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사도바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절대 사용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가 초기 기독교회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박해를 하였고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힌 사람입니까?

딤전1:13절에서 고백하기를,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 다고 하였고, 교회를 향한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26:11)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그 귀한 십자가의 복음을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고, 사도들 중에서도 뛰어난 가장 열심있는 복음의 종으로서 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이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 많아도 그것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으며, 도리어 그 연약함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일에 충성하고 섬길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고 하였고, 또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처럼, 허물이 크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우리가 이스라엘이 누려야 할 그 구원의 은총과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이제는 남은 이방인들의 구원은 물론이고,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난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오는 그 귀한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은혜중에 은혜요, 값없는 구원에 대하여 보답할 귀한 기회가 되는 줄 믿습니다.

 

5. 사도바울이 이 로마서를 쓴 당시의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유대인들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끝장이 난 것처럼 보일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하고, 대신해서 보내신 아들까지 죽였으니 누가 그런 이스라엘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25절에 보면,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고 하였고, 26절에 가서는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받은 흔들림 없고 변함도 없는 하나님 사랑인 줄 믿습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넘어짐으로 인해서 그것이 우리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제는 우리의 상태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회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2절의 말씀대로,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었" 다면, 오늘 우리의 이 상태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방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본문 14절에서 유대인들이 시기한다는 이 말은, 그들 가슴에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강력한 열정을 갖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이런 열정을 품게 만들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미국의 37대 닉슨 대통령(Richard Nixon, 1913-1994)이 미래학자인 허만 칸(Herman Kahn, 1922-1983)에게 미국의 미래를 연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연구를 마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를, 미국은 최첨단의 과학시대에 돌입할 것이고 미국은 계속해서 번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미국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파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허만칸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한국을 찾아와 대담하면서 대한민국은 반드시 세계 10대 강국이 된다고 예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학교의 학급에 30명의 학생이 있으면, 한국의 경우는 일등은 한명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우는 30명이 다 일등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 한 명 한 명에게는 남다른 우수함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내어 칭찬해 주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각각 자기가 잘하는 분야에서 1등임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돈은 생명이고 반드시 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나 일본사람들처럼 돈을 신으로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돈을 버는 이유는 착한 일을 많이 하기 위함이고, 선한 일을 위해서 많이 투자하고 많이 기부하고 착한 일을 앞장서서 행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나라를 잃고 2천 년 간 방황하던 핍박과 고난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이런 고난을 딛고 세계 최강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지금 국제적으로 뛰어난 IT계열의 그룹이나 금융그룹, 영화산업, 언론, 통신, 정유회사 심지어 곡물회사까지 그들이 장악하지 않는 분야가 없습니다.

초강대국인 미국 정부도 유대인들의 허락 없이는 달러를 찍어낼 수도 없습니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수, 학생의 30%가 유대인입니다. 지구상에서 그들을 이길 세력은 없습니다. 1970년대 초에 한국이 10대 강국이 된다고 예언한 허만 칸도 유대인입니다.

 

7. 문제는 그런 유대인들이 우리를 보고 마음에 불이 붙어서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나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부요함을 가져온 것처럼, 이제는 이방인된 우리를 통해서 유대인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이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무엇입니까?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결혼 적령기의 청년들 주위에 선남선녀가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서로 관심을 갖고 고백하고 사랑하고 함께 있어 준다면, 여기서부터 행복한 가정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그분에게 내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과 함께 한 몸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볼 때에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이런 고백도 없이, 인격적인 만남도 없이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은혜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떻게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사도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5:15) 고 했겠습니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해도 좋습니다. 내 믿음의 결심이 삼 일을 버티지 못해도 좋습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날 위해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고 피 흘려 죽어주신 그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고 그분을 나의 신랑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이 일본과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문을 열릴 것입니다.

내가 복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복음의 능력이요 우리가 복음을 위해 쓰임 받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중단없이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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