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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 곳이 없다(누가복음2:1-7)
고영수 2024-12-07 추천 0 댓글 0 조회 38
[성경본문] 누가복음2:1-7 개역개정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머물 곳이 없다(누가복음2:1-7/2024.12.8.오전)

 

1. 우리가 살다 보면 몸이 지치고 병들고 그래서 고통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때 약을 먹고 쉬거나 아니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건강이 회복되지만,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병들게 되면 약으로는 치료가 안되고 병원에 가도 방법이 없습니다.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이나 치료 방법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한 번 상해버리고 무너진 마음을 회복하는 데는 도움이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 마음이 무너지게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의 임금 사울 왕이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상 모든 권세와 부귀를 누렸지만 마음에 평안이 없었고 그래서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갖 방법을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인 무당을 찾아갔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삼상28).

다윗이라고 하는 훌륭한 사위를 만났지만, 한 번 병든 마음은 그 사위를 질투 시기하게 되면서 죽이려고 하였고, 도망간 사위를 찾아내기 위해 온 나라 안을 이 잡듯이 뒤지면서 돌아다녔지만, 결국은 처참한 죽음으로 불행한 인생에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과 위기를 통과한 그의 사위 다윗은 어떻습니까?

34:4절에 보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고 하였고, 8절에 가서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하였습니다.

 

2. 사울 왕은 제 인생의 모든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무너졌지만, 믿음의 사람 다윗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구했고,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사랑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수도 없는 인생의 위기를 통과하면서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그의 입으로 나온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흙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인생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흙은 토기장이의 손을 통해서 다듬어질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나듯이, 우리 인생의 주인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을 때 우리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께 묻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에게 문제를 맡길 때, 흙으로 지어진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면, 다윗의 동네에 요셉과 만삭이 된 마리아가 찾아왔습니다.

이유는 본문 1절에 기록된 대로 로마의 황제인 아우구스트가 로마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호적을 등록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이 이렇게 하는 목적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실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식민지를 포함한 백성에게 충성을 서약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왕을 위해 재물도 바치고, 왕을 위해 생명을 바쳐 전쟁터에 나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중대한 문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호적이라는 단어가 4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많은 사람의 관심이 호적을 만들고 등록하는 일에 쏠려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요셉도 갈릴리로부터 자기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 여러 날에 걸려 그것도 만삭이 된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만큼 호적 문제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7절에 보니, 요셉 부부가 아들 예수를 낳았지만 머물 곳이 없었다는 이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그가 태어난 순간에도 따뜻하고 안전한 방 한칸도 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셨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 왕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다윗성인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왕궁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축하를 받으면서 가장 행복하게 태어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하나님은 꼭 촌구석 베들레헴을 택하여 그곳에서 아들이 출생하도록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4.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섭리(攝理, divine

providence)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예정하신 그 뜻을 따라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섭리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유지 시키시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끼치시며 그의 정하신 목적을 따라 만물을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계속 사용하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다윗의 성인 예루살렘 왕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의 그런 곳에 요셉 부부를 보내어 그곳에서 출생하게 하신 것은 만세전부터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예정하신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자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고통받고 영원한 저주에 빠진 인생을 구원하고 그 일을 위해 그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백여 년 전에 이미 선지자 미가를 통해 미리 말씀 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5:2)고 하였습니다.

다윗성이 아니라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으로 가서 요셉 부부가 첫 번째 아들 예수를 출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었고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을 찢어 영생의 떡으로 우리를 먹이시기 위함인 것을 미리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들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쓰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고, 심지어 로마 황제 아구스도 또한 호적조사가 자신의 권력 강화와 자신이 누리는 권세를 자랑하고 확산하기 위해 만든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셨고 황제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당연히 우리도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왔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오늘 여기에 우리가 와 있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1:4-5) 다고 하였고, 또한 11절에서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 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베들레헴 여정은 겉으로 보면 호적을 위한 행정적인 조치에 응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속이 상하고 잘못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고 빼앗지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기 위한 수단임을 믿고 어떤 일을 만나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6. 문제는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동네에 왔지만 있을 곳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모든 사람이 호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적이라는 행정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은 강보에 싸여 말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워 계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그 당시는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면 별것 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못난 선택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최우선 순위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머물 곳은 없었지만, 이미 하늘에는 천군 천사로 가득했고, 그들이 부르는 기쁨의 찬양 소리에 온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동네인 이 베들레헴에 예수님이 머물 곳이 없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항상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은 나로 인해 늘 방치되고 무시되고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해롭게 만들고 우리를 고통하게 만드는 것들은 왜 항상 내 인생에 최우선 순위에 올려 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고, 우리의 죄가 은혜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모인 사람들처럼 정작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고 그분을 모실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호적, 호적 문제부터 빨리 해결해야 해! 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호적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내 안에 모실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7. 죄는 늘 우리를 고통하도록 만들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막을 능력이나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주셨고, 그것도 예루살렘의 왕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오시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죄는 우리를 온갖 혼란 가운데 빠뜨리고 있으며, 죄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죄는 우리를 탐욕의 노예로 만들었고, 죄로 인한 탐욕은 우리를 어리석은 존재로 만들고,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도리어 그의 심판을 자청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큰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다 보니,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알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거짓과 탐욕을 일삼는 자들의 선동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을 통해 답을 얻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지만, 하나님 떠난 그들은 능력도 지혜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죄가 모든 인생을 망치고 있으며, 죄가 인생을 고통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우리 가운데 주님이 계실 곳이 없다는 이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예수님 이외에 더 많은 것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으로 병들고 공허한 심령을 채우려고 하니 고통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지 못하게 만들었고 마굿간으로 쫓아내고 있습니다.

 

8.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11:28) 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온갖 쓰레기와 가치 없는 것들, 도리어 우리 인생을 고통하게 만들고 무거운 짐을 지우게 만드는 세상의 문제로 얽히고설킨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고 우리를 죄와 고통과 온갖 저주 가운데 빠진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면, 머물 곳이 없다고 방이 없다고 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마구간이라도 좋다면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하겠다고 말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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