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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바랄 것인가(시편42:1-5)
고영수 2025-01-19 추천 0 댓글 0 조회 76
[성경본문] 시편42:1-5 개역개정

1. 제이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무엇을 바랄 것인가(시편42:1-5/2025.1.19.오전)

 

1. 시편 42편은 43편과 하나로 된 노래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절히 그분을 사모하던 노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은, 인간은 연약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자기 백성을 돕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 속에서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그것을 방해하고, 세상 또한 우리를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온갖 염려와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의 많은 즐거움들이 우리를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시편 기자의 경우는, 고통 속에서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조롱과 비난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2. 시편 기자의 현실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이방 우상을 숭배하는 바벨론에게 점령당하고 성전은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먼 이국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니, 이런 상황에서 원수들의 조롱이 아니라도, 자신이 생각해도 과연 하나님이 어디 계시며 왜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한두 번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3절에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면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적들의 조롱과 공격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 다고 했습니다.

너무 속이 상하면,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고,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죽고 싶은 마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요즘 대한민국 상황을 보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도리어 법을 지키는 자를 공격하고, 내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도리어 국가를 바로 세우고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대통령을 내란죄로 잡아 가두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대통령의 입에서 사법부와 입법부가 불법에 불법의 불법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의 이런 현실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하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3. 대한민국에 좌파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기독교 신앙을 폄하하고 파괴하려는 대적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강해져 갔는데, 이번에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교회도 신앙도 끝장입니다.

그러잖아도 기독교의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성도들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대형교회로만 몰리면서 더 이상 개척교회에는 사람들이 가지 않으니 교회 개척은 엄두도 못 내고, 한국의 90% 이상의 목회자들이 이미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대학과 대학원에서 7년 동안 전문 분야에서 배우고 이제는 박사학위를 받으신 최고급 인력들이 목사라는 이유로 사회의 지도층이 아니라 구제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목회자와 성도들을 볼 때 무엇이라고 할 것 같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고 다 성공하고 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과거 선지자들과 순교자들도 형통은커녕 한결같이 고난과 멸시와 피를 흘렸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으며, 네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네 신앙을 증명해 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엘리야의 경우는 갈멜 산상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해서 그가 믿는 하나님을 불로 응답하시는 분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 똑똑히 보여 주었고, 3년 반 동안 가뭄으로 죽은 땅처럼 된 이스라엘에 비를 내려 모든 생명을 소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내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느냐 이것입니다.

 

4. 하나님 스스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32:10) 분이라 하였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28:20) 고 하셨는데, 과연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믿고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내가 고난 속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있을 때, 내가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실망하게 만드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시편 42편 전체를 읽어보면, 이 시편기자는 분명히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의 조롱 소리에 밤낮으로 울고 있으며, 5절에 가서는 자신이 낙심과 불안에 갇혀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만난 하나님, 내게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거하는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성도들의 가정에 믿지 않는 식구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며 많은 약속을 주셨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조롱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보여 주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속이 상해서 울었고, 마음에 평안을 잃고 낙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우리는 이렇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시편기자 처럼 똑같은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왜 너의 아버지의 도움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아들을 외면하시고 너를 죽도록 내버려 두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말에 대해서 틀렸다고 항변하기가 어렵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조롱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 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너는 거짓말쟁이요 가짜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서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27:42) 고 했는데,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그는 여전히 죄인이요 무능한 자요 거짓말쟁이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런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번만 축복하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면, 내가 평생에 힘써 전도하여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들과, 평생 수고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원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도가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하고 사단이 방해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 믿어서, 신앙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6.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속에서도 침묵하셨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거부하셨습니까?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시편 기자는 기도에 응답도 없고, 낙심하여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 같은 상황이지만, 자신이 가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베푸시는 은혜로 내가 견디고 믿음을 지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절과 4절의 말씀을 보면, 시편기자는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기뻐하였고, 그곳에서 감사와 감격에 쌓여 기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며 경배하던 것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모든 상황이 어렵고, 사방이 다 막힌 고통 속에서도 그가 기억해 낸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습니다.

이것은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도 이전의 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열망을 표현하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물이 없으면 사슴은 목이 타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이 목마른 사슴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시냇물을 찾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을 찾으면 살고 찾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전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갈망, 목마름 그 자체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으면 그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배를 위해,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진 자는 참으로 복 받은 자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 일수록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예배를 위한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7. 두 번째는 하나님이 과거에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한" 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주고 받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던 그 시간, 그 장소, 그 모습을 이제는 두 번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편기자는 그래서 속이 상하고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4절에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큰 즐거움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기쁨으로 찬양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함께 공감하고,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의무인 동시에 그 자체가 기쁨이고 축복이고 영광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4:10) 고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시편기자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며, 그 은혜를 함께 나누면서 함께 기뻐했던 그 사람들과 그 공동체를 사모하면서, 더 이상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슬퍼하고 속상해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서 예배하며 기쁨으로 노래하고 예물로 감사를 드리는 이 순간이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면 이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핍박이나 특별한 환경의 변화가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이 장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8. 세 번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신뢰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반드시 그 문제만 집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는 점점 작아지고 고통을 주는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네 하나님을 보이라고 윽박지르고, 네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할 때. 시편기자가 결심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자신을 향해 5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면서, 자기를 찾는 자들을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축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롯유다는 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한심했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하루빨리 로마 정권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가운데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것인데, 예수님은 병이나 고치고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사회적으로 쓰레기 같은 사람들만 돌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롯유다는 하나님의 뜻 보다는 제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무덤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기다림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도 고난 속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9. 마귀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릴 줄 아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원수를 대적할 수 없으며, 우리의 지혜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할 때 그들이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조롱하고 핍박하는 그들을 바꾸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백 마디의 말로 설득이 되거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내 삶 속에서 구원과 은혜로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을 우리는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조롱과 멸시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바른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능력이나 특별한 기적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조롱과 눈물과 탄식 속에서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를 믿고 기다리는 이것이 우리의 힘이요 소망이요 믿음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대한민국의 위기와 장래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기다릴 때,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의 능력으로 일으키신 하나님이 도우시고 회복케 하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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