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태복음27:45-5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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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3)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온 땅에 임한 어두움(마태복음 27:45-56/2025.4.13.오전)
1.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때 제일 먼저 만드신 것이 무엇입니까? 3~4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神は「光あれ」と言われた。すると光があった。神はその光を見て、良しとされた。神はその光とやみとを分けられた。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먼저 창조하시고 보시기에도 좋았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세상에 빛이 없다면 아름다움도 추함도 느낄 수 없으며, 만물의 가치도 측량할 수 없으며, 인간의 활동은 물론이고 생명조차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의 기본인 빛을 먼저 창조하신 후에 차례로 세상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빛에 의해 드러나고, 빛에 의해 가치가 창출되며 빛은 생명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마지막 운명하시기까지의 3시간 동안에 온 땅은 빛을 잃고 어두움에 갇히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 빛이 없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태양 빛이 없어도 하루 24시간 사방 구석구석을 밝혀 주는 빛이 있고, 잠시 빛을 잃어도 다시 밝힐 수 있는 환경 때문에 빛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류가 빛을 잃어버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여 더 이상 태양은 떠오르지 않으며, 인간의 힘으로 더 이상 불을 밝힐 수 없는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2. 오늘 본문은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さて、昼の十二時から地上の全面が暗くなって、三時に及ん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제 육시는 지금의 정오, 즉 정오를 의미합니다.
해가 중천에 떠서 가장 밝은 빛을 비추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갑자기 세상에서 빛은 사라지고 천지가 캄캄해졌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소동하며 두려움에 떨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 생긴 이 어두움의 현상은 일식의 현상이 아니겠느냐고 하는데, 그때 이스라엘은 유월절 명절이기 때문에 일식 현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온 땅에 임한 어두움" 地上の全面が暗くなって이 어느 정도의 어두움인지, 그 규모는 지구 전체인지 아니면 유대 나라의 지역적 현상인지 이것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애급에 임한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어둠의 재앙(출11:21-23)을 생각해 볼 때, 이 어두움은 지역적인 어두움일 수 있으며, 그 어두움의 정도가 사람이 서로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요, 어둠의 재앙이 3일 동안 사람이 침상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고 했으니,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카만 어두움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경험하는 일식 현상처럼 보고 행동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어두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왜 밝은 대낮에 그것도 갑자기 어두움이 임했느냐 하는 것이고, 이 어두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시기에 스스로 좋았다고 만족하셨고, 사람들이 빛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아시면서 왜 이 땅에서 잠시 빛을 거두셨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 어두움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버지의 슬픔이었습니다.
이 어두움은 인간의 죄 때문에 거룩한 아버지로부터 잠시 분리당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나타내는 어두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 어두움은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세상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처참하고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어두움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1: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この言に命があった。そしてこの命は人の光であった。고 하였고, 5절에는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光はやみの中に輝いている。そして、やみはこれに勝たなかった。고 했고, 9절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 すべての人を照すまことの光があって、世にきた。다고 하면서, 이 빛은 전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인류가 노력해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21세기의 첨단 문명을 자랑해도, 빛의 근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면, 생명은커녕 인류에게 더 이상의 미래가 없으며, 어둠에 갇힌 흑암의 고통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4. 그렇습니다. 빛을 잃어버리고 어두움에 갇힌 인류에게는 더 이상의 미래는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죄가 영원한 생명의 빛을 버렸고 그 빛 되신 그리스도를 우리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을 잃고 어두움에 갇혀버린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인간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매일 방황하고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악하고 더럽고 방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빛을 잃어버린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그래서 죄짓는 일에 용감하고 죄를 지어도 회개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매일 세상에 쏟아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벨탑의 문명이요 소돔 고모라의 타락이요 네피림의 저주받은 문명입니다.
왜 사람들이 병들고 실패하고 방황하며 고통과 저주 가운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까?
빛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빛되신 하나님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마11:28절에 보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초청하며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すべて重荷を負うて苦労している者は、わたしのもとにきなさい。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よう。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죄의 짐을 지고 쉬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5. 바벨탑과 소돔 고모라와 네피림 문명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매일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촌의 대부분의 사람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온갖 의무를 부여하고 온갖 규제를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고 삶을 속박하면서도, 피땀 흘려서 수고한 삶의 대가를 이 핑계 저 핑계로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면 살수록 인생의 짐은 점점 무거워질 뿐이고, 어릴 때 가졌던 이름답고 소중했던 꿈들은 간 곳이 없으며, 남는 것은 늙음과 질병과 마음의 상처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며 왜 우리 인생이 노예처럼 되고 말았습니까?
생명과 빛의 근본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움은 고통이요 이 어두움은 영원한 저주를 의미하며, 이 어두움은 생명의 빛을 잃은 인간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끔찍하도록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버림받게 했고, 우리의 허물과 욕심이 그분을 죽음과 저주의 고통을 당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이 그분을 수치스럽게 만들었고, 우리 어리석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아무리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삶을 산다고 해도, 빛과 생명의 근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참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을 믿고 영접하면 안식할 수 있으며, 평안함을 누리되 그것을 영원히 누리는 줄 믿습니다.
6. 계속해서 본문 46절을 보니, 예수님의 마지막 절망적인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 십자가에 버리셨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이미 시편 22: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わが神、わが神、なにゆえわたしを捨てられるのですか。なにゆえ遠く離れてわたしを助けず、わたしの嘆きの言葉を聞かれないのですか。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절망적인 부르짖음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신 포도주를 주어서 마른 목과 고통을 멈추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이 말라서 육신이 고통스러워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은, 십자가의 고통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더 괴로워하셨던 것입니다.
대신 짊어진 인간의 죄로 인하여 거룩한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을 괴로워하셨고, 공의를 이루시는 아버지로부터의 외면당하심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짖음이 무엇입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이것은 그가 아버지께 버림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왜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이렇게 비참하도록 버림을 당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우리의 죄가 그분을 수치스럽게 하였고, 우리의 죄가 그분을 버림받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고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고, 우리 죄 때문에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진노가 언제까지 우리 위에 머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7.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고, 33년 생애를 십자가에서 마감하셨습니다.
누가23:46절에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기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父よ、わたしの霊をみ手にゆだねます」。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고, 요한19:30절에는 "다 이루었다" 「すべてが終った」고 말씀하신 후에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 마지막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수많은 사람의 증거 중에 54절에 보면 로마 사람 백부장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まことに、この人は神の子であった」と言った。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다른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는 크게 나누어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누고 있는데, 서방교회는 우리 개신교와 천주교가 있고, 동방교회는 그리스 정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십자가의 모형이 각각 다릅니다.
서방교회는 십자가의 모형이 가로가 짧고 세로가 긴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가리켜 라틴형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가로 세로가 동일한 길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을 보면, 가로 세로가 동일한 것은 동방교회 건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형태가 다른 만큼 십자가의 의미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방교회인 개신교와 천주교에서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당하신 것을 의미하고, 그 고난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십자가는 고난 보다는 그분의 부활과 승리의 상징으로 바라 보고 있습니다.
8. 그렇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의 생각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날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실상은 동정을 받아야 하는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 가운데서 신음하고 고통하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쌍하므로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여 영원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십자가에 대하여 서방교회나 동방교회가 가진 견해를 다 같이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역사가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 더 크고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있으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고난의 십자가를 보고, 동시에 승리와 영광의 십자가로 보는 이것이 가장 은혜가 넘치는 생각입니다.
계속해서 본문51절 이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만인 제사장의 길이 열렸고, 심지어 무덤까지 열려서 죽은 자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백부장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도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죽음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9. 온 땅에 임한 어두움은 아들을 잃은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하신 아들의 슬픔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당하시는 이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안에 머물렀던 온갖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그의 부활의 영광에 까지 함께 이르게 된 것은 은혜 중의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요 인생을 비추는 영원한 빛이십니다.
그래서 빛 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며, 이 세상에서도 빛 가운데서 행하는 줄 믿습니다.
그가 우리 가운데 생명의 빛으로 오셨으니 우리 심령에 임한 온갖 어두움이 물러갔습니다.
가정의 어두움도 물러가서 복음화 될 것입니다.
일본 땅도 어둠의 사신 우상의 세력이 물러가고 마침내 복음화로 영원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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