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강태국 박사님의 「나의 증언」중에서
김성수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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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강태국 박사님의 「나의 증언」중에서 일본 유학기 시절
1. 일본의 4년
그 당시에 일본을 가려고 하면 도강증을 경찰서에서 얻어야 한다. 일본 사람들은 현해탄을 하나의 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을 가리켜 내지(内地)라고 하였다. 그러니 저들은 조선을 완전히 일본에 속한 일개의 영토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에 조선을 내선일체라고 말로는 그러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 차별이 모든 면에 있어서 혹독했던 것이다. 저들이 일본 사람을 가리켜서는 나이찌진(内地人)이라 하는 반면에 조선 사람을 가리켜서는 센진(鮮人)이라고 했다. 센진이라는 이 칭호는 우리 민족을 야만시하는 칭호이다. 그리고 저들은 우리 한반도 출입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누구든지 무상 출입하면서 우리가 도일하려고 하면 경찰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저들이 말하는 도강증(渡江証)은 목적이 뚜렷해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 신호시(神戸市)에 있는 중앙신학교 입학 허가서를 제출하고 겨우 도강증을 얻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나 일본에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기독교를 미워하면서도 사회주의를 배격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이러한 저들의 생각을 알았기 때문에 도강증을 얻기 위해서는 신학교를 일본행의 목적으로 내 세울 수밖에 없었다.
2. 중앙신학교 시대
1932년 3월 말에 나는 도일에 성공했다. 그리고 신호시에 있는 중앙신학교 제 2학년으로 입학하였다, 당시의 중앙신학교는 미국 남장로교파 외지 전도부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학제는 5년제였으며 입학 자격은 5년제 중학 졸업자였다. 나는 4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2학년으로 편입이 허락되었다. 이 학교의 교수진은 미국인 선교사가 4명이고, 일본인 교수가 3명, 합해서 7명이었다. 그리고 교장은 에스・피・풀톤이라고 하는 70 고령의 노교수였다.
그는 조직신학을 가르쳤는데 나의 신학사상은 그에게서 처음 받은 것이었다. 이 학교는 철두철미한 보수 정통학교였다. 이 학교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기에 신입생은 매년 11명 밖에 받지 않았다. 전교생 합해서 55명 정도 되는 이 학교에는 등록금도 없고, 기숙사 입사비도 없었다. 식비만 있으면 해결되었다. 그러니 이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입학 시험도 없었지만 신입생 수가 11명 밖에 안되니 특별한 추천생들 가운데서 선발하기 때문에 입학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기숙사 독실을 얻어 여장을 풀고 보니 그 방은 마침 일본에서 유명한 하천풍언(賀川豊彦)선생이 있었던 방이라고 하였다. 이 방이 나를 위하여 남아있는 것은 방이 너무도 낡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경제적인 압박이 뒤를 따랐다. 그래서 이 학교 기숙사의 목욕물 불 때는 노동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옛 은인인 남대리 선교사에게서 매월 장학금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3. 사상의 전환기
내가 일본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공부하기 위하여 왔는가? 내가 일본에 온 것은 독립운동의 자료를 얻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위하여 어떠한 준비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막스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젊은 사람 치고 막스의 사상을 알지 못하면 어디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무식자 취급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막스 자본론을 읽으려고 한 것은, 그 당시의 일본 군국주의를 대항하여 투쟁하는데 하나의 무기를 삼으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었고, 나를 티끌 가운데서 취하시고 오늘까지 양육하시고 교육시켜, 이제 신학교에까지 나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막스 자본론을 읽던 어느 날 나의 양심은 심히 괴로웠다. 그리고 나의 양심은 나에게 외쳤다. 「이놈, 네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일본까지 와서 무신론자인 막스의 서적을 읽다니」하고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자본론을 덮었다. 그리고 나는 거꾸러졌다. 마치 다메섹 도상의 사울처럼,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나는 다시 내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막스 자본론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항일 투쟁을 위한 도구로 쓸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닌가!
그러나 현재 나는 신학교에 있지 아니한가? 자본론은 후일에도 읽을 수 있으나 신학교는 다시 들어 올 기회가 없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신학교에 있는 동안에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자본론을 버렸다. 그 날 이후 오늘까지 나는 자본론을 다시 읽어보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 나는 열심히 교실에서 또한 도서관에서 공부하였다.
신학교 2학년 때에 내가 공부하는 중 가장 취미를 가졌던 것은 예수의 행적이었다. 당시에 나에게 기독전을 가르치신 이는 마야스 박사였다. 마야스 박사는 하천풍언씨에게 신앙의 아버지였다. 그의 기독전 강의는 훌륭하였다. 나는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열심히 필기하였다. 그리고 또한 도서관에서 기독전에 대한 책들을 많이 상고하였다. 나는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졸업한 뒤에 그의 강의를 토대로 하고 우리말로 기독전을 한 권 쓰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졸업하던 해, 즉 1936년도에 「종합4복음 연구」라는 기독전을 출판한 것이다.
4. 목회시작
그리고 신학시절 나는 병고현(兵庫県) 식가마라고 하는 곳에 교포 교회의 전도사로 취임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목회의 시작이었다. 물론 목회라고는 하지만 풀타임이 아니었고, 신학교에 다니면서 토요일에 교회에 가서 월요일에 돌아오는 파트 타임 목회였다. 나는 이 교회에서 1년간 봉사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즉 1933년부터는 대판시(大阪市) 大仁本町이라는 곳에 있는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대판에는 동부, 서부, 그리고 大仁本町외에 몇 교회가 있었다. 그 중에 제일 큰 교회가 동부교회로서 자립교회였다. 당시의 담임 목사는 오재경씨의 엄친 되시는 오택관 목사님이셨다. 그리고 내가 섬기는 교회는 한국에 있는 연합공회의가 파송한 김수철 목사님이 시무 하셨다.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장, 감 연합공회의가 있어서 번갈아 가면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파송된 선교사는 대판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선교사 밑에서 봉사하였던 것이다. 나는 토요일 오후에 대판에 와서 심방하고 주일에는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월요일에는 신호시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기를 3년을 하였다.
당시 대판과 신호 사이에는 阪急, 阪神이라는 시외 전차가 있었다. 나는 늘 阪急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이 전차선로 중간에 니시노미야(西宮)라고 하는 전차역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까라즈카(宝塚)」라고 하는 세계적인 가극장이 있었다. 동시에 이것은 유명한 관광지가 된 것이다.
나는 그 옆을 3년 간 지나다닐 때마다 나를 유혹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가 보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일본에 보내신 것은 관광을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관광을 위하여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아니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나에게 주어진 일본에서의 할 일은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관광 같은 것을 위하여 쓸 시간이 없었다. 세월은 참으로 빨라 어느덧 나는 4학년이 되었다. 앞으로 1년 후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떠나게 될 것이다. 나는 졸업 후의 할 일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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