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김성수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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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1. 일본인의 기원
일본인의 뿌리 찾기는 최근 고고학·인류학·언어학 등 다방면에서 행해져 고분이나 매장품의 마구 등에서 북방계의 기마민족설, 여러 가지 문화의 관련으로는 중국 남방설, 주거나 신화의 유사성에서 폴리네시아계의 남방설, 시베리아로부터의 남하설 등이 전해져 왔다.
일본에서는 10만 년 전의 인골도 발견되었지만, 현재 일본인의 원형이 되는 인류는 약 18000년 쯤 전에 일본으로 왔다고 보여진다. 이 시대는 빙하기의 가장 추웠던 시기에 해당되고, 해면이 현재보다도 140m 정도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식료였던 맘모스를 쫓아, 전지국적 규모로 민족 이동이 행해지고, 몽고로이드가 북미, 남미로도 건너간 시기이다.
일본 주변에서는 대한해협이나 황해, 류큐열도 등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 이 때문에 북방으로부터는 추운 기후에 적응하는, 얼굴의 요철이 적고 키도 작은 신몽고로이드가, 남방으로부터는 아시아 대륙 내부에 널리 살고 있던 둥근 얼굴의 고몽고로이드가 건너왔다. 이 둘은 드디어 혼합하여 점점 신몽고로이드의 특징이 강하면서 고몽고로이드의 특징도 갖춘 「원일본인」이 태어났다. 신체적인 특징은 둥근 얼굴로서, 키가 작고, 털이 많은 인종이다.
「원일본인」은 일본 각지에 살고 있었지만, 야요이 시대부터 고분 시대에 걸쳐, 한반도에서 갸름한 얼굴로 키가 크고, 보다 앞선 기술과 문명을 가진 민족이 서일본으로 이주해 와서, 원일본인에게 문화적인 영향을 주는 것과 함께, 점차로 넓게 이주하여, 원일본인과 혼합하여, 현대 일본인이 태어났다.
현대 일본인을 살펴보면, 북쪽에는 둥근 얼굴의 키가 작은 사람, 남쪽에는 갸름한 얼굴의 키가 큰 사람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2. 日本의 歷史와 韓国
한국과 일본은 오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왔다. 그리고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어온 것은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온 사람들이고, 한국 문화였다.
縄文時代 죠몽시대
일본 열도에서는 홍적세 시대부터 인간이 생활해 오고 있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몇 명에서 열 명까지가 한집에 살며, 생활을 수렵, 어로, 채집에 의존하고, 빈부·계급 차이가 없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때 만들어진 토기는 죠몽식 토기라고 한다. 한편, 이 토기는 1969년 한국 부산시 동삼동에서도 발견되었다.
弥生時代 야요이시대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에서 큐슈 북부에 벼농사와 금속기 사용의 기술이 도래했다. 벼농사 기술은 생산을 증대시키고, 빈부·신분의 차를 만들고, 농촌 공동체를 정치집단화 하는 등 획기적인 사회 변화를 초래했다. 또, 284년에는 아직기와 양마가 백제로부터 도래하고, 285년에는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갖고 도래하였다.
古墳時代 고분시대
기원 후 4세기 중엽, 난립해 있던 소국가가 야마토 정권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 시대는 한반도에서 많은 지식, 기술이 유입한 시대이고, 일본의 정치나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飛鳥時代 아스카시대
6세기로 들어가자 백제로부터 오경박사 등의 많은 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소가씨(백제의 木씨)는 도래인의 앞선 문화나 기술을 도입했다.
538년에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지자 소가씨는 열심히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것은 불교의 신앙뿐만 아니라, 불교 문화와 앞선 정치 방법을 도입하려 했던 것이었다. 593년, 쇼토쿠태자가, 섭정이 되자 소가씨와 손잡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595년에는 고구려의 혜자와 백제의 혜종이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어, 불교와 학문을 가르치고, 597년, 백제의 아죄태자, 602년에 관혁(역서, 천문지리서 등)·고구려의 융과 운총, 610년에는 담징(그림도구와 종이·벼루의 제작법 등)과 법정, 625년에는 혜관이 건너왔다.
또, 한반도에서 기술자를 불러, 호류지(607년 건립)와 시텐노우지(신라의 도래인·와니와키시의 우지테라)를 만들었다. 다른 호족들도, 앞다투어 일족을 위한 절을 세웠다. 도래인의 우지데라로는 하타씨의 코류지, 쿠다라노코씨씨의 백제사, 카와치노후미씨의 사이링지, 후나씨의 야추지(오사카부), 야마토노아야씨의 히노쿠지(나라현) 등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당과 손잡고,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다. 일본은 백제의 요청에 의해 구원 군대를 보내어, 백촌강(지금의 금강)에서 신라·당군과 싸웠지만 패하여 퇴각했다. 이어서 신라와 당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때, 멸망한 백제·고구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도래했다. 이들 도래인에는 귀족이나 학자, 기술자가 많았고, 각지의 개척이나 학문·기술을 살려 일에 착수했다.
호류지의 벽화와 타카마츠즈카 벽화가 그려진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일본은 백촌강에서 패한 후에(663년 8월)는, 신라의 침략을 두려워해 이키·쓰시마·키타큐슈 등에 사키모리라고 하는 병사를 보내고(664년), 키타큐슈에 다자이부를 두고, 키타큐슈와 세토우치에 한국식 산성(오오노성, 나가카도성, 카나다성, 야시마성, 다카야스성)을 쌓아 굳게 지켰다.
奈良時代나라시대
710년에 수도를 헤이죠코(지금의 나라시 및 근교)로 정하고 율령국가의 융성기를 맞이하지만 8세기 중엽이 되자, 귀족의 싸움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흉작이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도망치고, 사회 불아닝 높아갔다.
쇼무천황은 불교의 힘에 의해 나라의 평안을 지키려고지역마다 국분사를 만들고, 수도에는 토다이지를 세우고, 대불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대불공사에는 연 260만명이나되는 일손이 필요하였다. 생활에 괴로운 인민을 동원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교키(백제 도래인의 자손)를 대승정이라는 높은 벼슬을 주고 협력으 구하였다. 총책임자인 쿤나카노키미마로, 대불전 건축의 책임자인 이나베노모모요, 대불에 바르는 금을 모아온 백제왕 경복(의자왕의 6대손)등, 모두가 도래인의 자손이었다.
平安時代헤이안시대
나라시대 말에는 귀족의 싸움이 일어나고 정치가 어지러웠다. 칸무천황은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794년에 헤이안쿄(지금의 쿄토시)로 도읍을 옮겼다.
칸무천황의 생모 타카노노니이가사는, 백제 도래인의 귀족 출신이고, 천황의 황후중에도 도래인의 자손이 맞아들여졌다. 쿄토는 도래인 하타씨(신라의 도래인)가 개발한 곳으로, 천황은 하타씨의 힘을 빌려 헤이안쿄를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도래인의 자손인 사이쵸는., 당에 건너가 천태종을 배워, 귀국해서 히에이산에 엔략쿠지를 열어 천태종을 펼쳤다.
鎌倉時代카마쿠라시대
1192년, 미나모토노요리토모가 카마쿠라에 막부를 열어 무가정권이 탄생했다.이 때, 몽고군은 고려를 침략했다(1231년).
고려국왕은, 몽고와 강화를 맺어 항복하고(1258년), 고려는 이후 100년 남짓이나 몽고에 복종하게 되었다. 고려의 무관들(삼별초군)은 강화에 반대해서 진도·제주도 등에서 싸움을 계속했다. 그리고, 삼별초군은 일본 원정용 배를 만들고 있던 조선소를 파괴함에 따라, 몽고의 일본 침략은 크게 늦어지게 했다.
1274년 원·고려 연합군 3만이 이키·쓰시마·하카나로 밀려들어, 일본의 무사들은 고전했지만, 마침 일어난 폭풍우에 의해 원의 배는 침몰하고, 원군은 도망쳐 돌아갔다. 1281년, 원은 다시 대군으로 일본을 공격했다. 또 일어난 폭풍우의 덕분으로 이것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막부의 무사통제가 곤란하게 되어,막부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室町時代무로마치시대
1333년, 카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남북조의 내란이 계속되었을 무렵, 한반도와 중국의 연안에 왜구라고하는 일본의 해적이 있었다. 1350년, 고성·거제에 외구의 침략이 있었다. 이 때 고려의 병력은 북방에 배치하여, 원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 지방에는 병력을 파견할 수가 없었다. 1367년,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단속을 요구했지만, 막부도 이 왜구를 누를 수 없었다. 때문에 1377년, 고려에서는 정몽주가 하카타로 가서 이마가 와사다요를 만나, 왜구의 단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쓰시마까지는 제압할 수가 없어, 고려에서는 1389년 박위장군이 쓰시마를 공격했다.
1393년, 고려는 각추를 보내어 왜구를 단속할 것을 요구하자, 당시 아시카가는 쥬인을 고려에 보내와서, 왜구 단속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1396년·1397년·1399년에 아시카가는 사절을 보내와서, 왜구를 단속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고려에 보고했다.
1419년, 이종무가 쓰시마를 공격했다. 쓰시마에 있어서는, 조선과의 무역이 가장 중대한 문제였으므로, 소우씨는 즉시 사절을 파견해서 해적의 단속이 불충분하였던 것을 사죄했다.
安土・桃山時代아즈치·모모야마시대
오다노부나가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정권을 쥔 시대이다. 국내의 통일을 이룩한 토요토미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2일에, 스스로 키타큐슈까지 진출해 와서,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5월 3일에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더욱 북쪽으로 진출했다.
조선수군을 거느린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으로 일본 수군을 부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의병에 쫓겨, 식료와 탄약 부족으로 괴로워하던 일본군은 휴전에 응했다. 이것을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군은 재차 1597년 2월 11일에 14만 대군으로 침략해 왔다. 이거을 정유재란(케이쵸노에키)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방비를 단단히 한 조선군과 의병으로 고전했다. 다이묘와 무사 중에는, 귀국을 바라는 소리가 높고, 히데요시의 죽을을 계기로 물러났다.
이 두 번에 걸친 침략에 의해, 조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집이 타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또 토요토미히데요시는 문화재의 계획적인 약탈을 위해, 승려 에케이를 파견해서 많은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일본은 몇만명이나 되는 조선인을 포로로 데리고 돌아가 노동을 시켰다.
다이묘들은 일본에서 보물처럼 취급하고 있던 청자·백자를 갖고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많은 도공을 잡아와서, 자신의 영내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하기야키의 이작광, 우에노야키와 타가다야키의 존계, 타카토리야키의 팔산, 카라츠야키의 홍호연, 아리타야키의 이참평, 히라도야키의 거관, 사츠마야키의 심당길 등). 지금 각지에 전해져 있는 도자기의 대부분은, 이 때에 시작된 것이다. 또, 총사령관 우키타히데이에는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활자고를 습격해서, 급속 활자를 전부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 이 금속활자와 잡아 끌고간 활자공·인쇄공·제지공들(약 5만명)에 의해 일본의 인쇄기술이 진전되었다. 강항(주자학자로 후지와라세이카의 스승) 등의 많은 학자도 데리고 가서, 일본의 학문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
江戸時代에도시대
토쿠가와이에야스는, 1603년에 막부를 에도(지금의 토쿄)에 열고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바라며, 쓰시마의 소오요시토시에게 조선과 이야기하게 했다. 소오씨의 노력에 의해, 1604년 8월 사명대사(유정) 등이 탐적사로 쓰시마에 갔다.
이에야스는 조선의 사자를 쿄토로 불러서 후하게 대접하고,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잡혀온 1300명의 포로를 귀국시켰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국서를 조선에 보내고, 국교의 회복을 요구했다. 조선조정에서는 국교회복의 조건으로서, 두 번다시는 침략하지 않을 것,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건네줄 것 등을 일본에 요구했다.
1606년 11월, 국서를 휴대한 일본의 사절이 왕릉을 파헤친 범인 두 사람(실제는 쓰시마의 죄인)을 넘겨 주었다. 이것을 받아들여, 1607년 조선의 사절이 에도를 방문하고, 정식적으로 조일 국교가 재개되었다. 조선의 사절은 통신사라고 불려졌고, 에도시대에 12번이나 일본을 방문했다.
쓰시마의 소우씨는, 막부로부터 조선과의 외교·무역을 맡아, 부산에 왜관을 만들어 무역을 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가 흑선을 이끌고 강하게 개국을 요구했다. 막부는 1858년, 미일수호 통상조약을 맺어 개국하고 무역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일본에게 있어서 매우 불평등한 내용의 것이었다.
막부와 번의 엄격한 정치에 괴로웠고, 개국으로 물가가 올라 점점 살기가 곤란한 농민이나 쵸닝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를 만들려고 손을 잡고, 막부를 넘어뜨릴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토쿠가와요시노부는 대정봉환(1867년)을 하고, 약 700년 계속된 무가정치는 끝났다.
明治時代메이지시대(1868∼ )
메이지정부는, 번을 없애고 현을 두고,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징병제와 조세개정을 실시했다. 또, 근대공업을 일으켜 나라를 윤택하게 하고, 강한 군대를 만들면서 근대롸흘 서둘렀다. 이때, 일본에서는 쇄국을 계속하는 조선을 공격하자는 「정한론」(1873년)이 사이고타카모리 등에 의해 나오고, 메이지정부는 크게 동요되었다.
1875년, 일본은 강화도를 공격하고, 다음 해에는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쇄국을 포기하고, 부산·인천·원산을 개항하여 통상을 시작했다. 일본 상인은 조선에서 싼 값으로 많은 쌀·콩·인삼과 금을 사들여, 일본으로 수입했다. 대신에 조선에는, 직물과 잡화 등의 일용품을 팔았다. 그 때문에 조선의 수공업은 쇠퇴하고, 식료품 부족과 물가앙등으로 조선인의 생활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조선인 사이에는 일본의 경제적인 침략과 그것을 허락하고 있는 민씨일족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1882년 조선군의 일부가 일어나 민씨정부를 넘어뜨렸다. 이것을 임오군란이라 한다. 민씨는 처으이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다. 여기에 대해 김옥균 등은, 일본과 맺어 민씨를 넘어 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따. 그러나 민씨와 청의 반격에 의해 3일만에 넘어졌다. 이것을 갑신정변이라고 한다. 청과 일본은 서로 조선에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출병할 때는 서로 연락할 것을 약속한 텐진조약을 맺고 물러났다.
1894년 전봉준과 농민들이 정부를 넘어뜨리고 일본을 비롯한 외국세력을 쫓아내는 싸움을 일으켰다. 조선정부는 청에 도움을 청했다. 청의 조선 출병을 안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서의 세력을 더욱 펼치려고 청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조선정부에 여러 가지 요구를 하고, 조선정부에 일본인을 넣어 조선을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삼국간섭에 의해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고, 조선에서도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에 대항하려고 하는 세력도 나왔다. 초조한 일본의 관리와 군인은, 왕궁에 난입하여 민비를 살해했다. 이것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중국 동국지방(만주)에서 조선으로 세력을 펼치고, 일본도 조선에서 만주로 진출하여 양국은 대립하여, 1904년 러일전쟁을 시작했다. 조선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서울에 군대를 넣어, 조선정부에 일본으로의 협력을 요구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을사조약을 맺어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고, 통감부를 두어 지배했다. 최초 통감이 된 이토오히로부미는, 한국의 장래를 격정한 안중근 의사와는 이토오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러나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을 단행했다.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두었다. 총독은 한국의 정치·법률·재판·군대의 모든 것을 쥐고, 헌병경찰을 이용하여, 한국인의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감시의 눈을 번쩍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방항하는 자는 잡아 처형했다. 일본은 1910년부터 한반도 전 국토의 토지조사를 행했다. 총독부는 수속을 하지 않았던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다. 이리하여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때에는 조선의 가장 기름진 논밭의 대부분이 일본인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삼엄한 일본의 감시아래에서도 한국 민중의 저항은 뿌리깊게 계속되었다.
大正時代타이쇼시대(1911∼ )
1919년 2월 8일, 재일 한국인 학생들이 토쿄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또, 한국에서도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장에 각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와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을 3·1 운동이라 한다.
1923년 9월 1일, 칸토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토쿄·요코하마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 중에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조선인의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내무대신 미즈오렌타로와 경시총독 아카이케노우들). 일본정부는 군대를 출동시키고, 마을마다 자경단을 만들어 한국인이라고 판단되면 체포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이 때 죽은 한국인은 6,661명(독립신문 김승학의 조사)를 넘는다고 말해진다. 또 사체는 토쿄도내의 강(특히 아라가와)이나 하수구에 버렸다.
昭和時代쇼와시대(1925∼ )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날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또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31년, 일본은 대군을 한국에 보내고, 만주지방을 침략했다(만주사변).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은 한국을 군사기지로 해서, 한국인을 전쟁에 협력시키기 위해, 학교수업도 모두 일본어로 사용하고, 한국어의 사용은 금지했다. 또, 1939년에는 창씨개명이라고 해서, 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했다.
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1939년, 일본정부는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인에 대해 일본에의 「강제연행」을 시작했따. 억지로 끌려간 한국인은 80만을 넘었고, 탄광·광산 등의 건설현장에 보내졌다. 또 1944년에는 한국인에게도 징병제를 실시하고, 모든 성인 남녀에게 병역을 부담시켜, 전장으로 내몰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하여, 한국도 민족의 해방을 맞이했다. 1951년부터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반대운동도 일어났지만, 1965년에 겨우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어 대한민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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