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한국인을 통한 일본선교
김성수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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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인을 통한 일본선교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박수길목사
들어가는 말
먼저 재일코리안의 역사를 하나의 예로 들어 보고자 한다. 몇해 전에 모친상을 입은 50대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자기의 어머니가 재일 코리안으로 쓰라린 일생을 일본 땅에서만 보내게 한 조부모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계(家系)는 족보를 알아보니 조선시대 왕족의 이씨 자손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숙모와 숙부는 풍요롭게 자부심을 지닌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일본 땅에서 신앙은 독실했지만 고생하며 힘든 생애를 미련을 지닌 채 마치고 말았다. 그래서 이처럼 일본에 시집와 살게한 조부모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장례식날에 비로소 숙부로부터 알게된 사실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인 태평양 전쟁 당시 군수 공장에 징용이나 노동자로 끌려오는 여인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지방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부모들 중에서 자기의 딸이 일본의 군수공장이 아닌 종군 위안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안 부모들이 서둘러 자기의 딸을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에게 시집을 보냄으로 종군 위안부가 되지 않게 했다고 하는 슬픈 역사이다. 이런 사실을 듣고는 그때까지 조부모를 원망하고 있던 그녀는 실은 모친을 돕기위한 조부모의 몸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결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런 원한은 사그러졌다. 그러나 그런 과거의 역사를 알지 못했던고로 조부모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이미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고인(故人)이 되었기에 괴로와했다. 그러나 그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회개와 용서의 복음을 자신의 현실의 일로 받아들임으로 원망을 통해 속박되어 있던 모든 영적인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또 그러한 과거의 고난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머니를 지켜주셨던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언젠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교회 다니기를 그만 두겠다고 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오히려 자기 여동생까지도 전도하여 이전보다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할 정도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부모와의 사별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 생긴 비탄 속에서 교회의 신자들이 곁에 있어 슬픔을 나누는 것을 통해 유족의 마음이 열리고 사별을 통해 생긴 영적인 고민이나 의문에 대해 목회자를 비롯하여 교회원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함께 아픔을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유족은 무거운 짐과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부모의 신앙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해 갈 수가 있었다. 이와같이 고난을 통과해 나온 교회와 교회원은 아픔과 비탄에 대해 함께 나눌 수 있는 위안의 기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1. 재일한국인과 在日大韓基督敎會
1-1.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특징
그것은 첫번째로 초교파성 즉 에큐메니칼적이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의 합동을 이룬 교회로서 형성되어 왔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 장/감/성 연합의 교회로 전도 활동을 전개해왔다. 그동안 타교파와의 선교 협력과 협약을 체결하는 일로 여러가지 신앙 스타일이 교회 안에서 초교파성을 지니면서 하나가 되어왔다. 이어 두번째로 소수성(minority)을 들 수 있다. 재일(在日)로서의 존재 피차별 체험으로부터 오는, 인권•인간존엄에의 대처이다. 이것이 아픔을 안고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다양성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의 1세와 그 후손인 재일2세부터 5세까지 있는 재일(在日)의 세대, 최근에 도일한 新1世, 그리고 일본국적을 지닌 자와 재일코리안 국적을 지닌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더블, 한국에서 건너와 일본인과 결혼하여 사는 분, 한국인이나 한국에 흥미를 가진 순수한 일본인 등 다양한 구성원이 교회에 있다. 그에 따른 사용 언어의 이중성, 아이덴티티의 문제등이 있지만 그것들을 풍부함으로서의 다양성으로 일본선교의 원동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1-2. 새노래로 주를 찬양하는 청년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세기32장1절-2절)
재일대한기독교회는 현재 출석 세례교인수 7천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96년의 역사를 지닌 소수자(Minority)공동체의 교단이다. 우리는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당했던 설욕의 36년을 잊을 수가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국적의 일본군으로 전쟁터에 끌려나가 피흘려가며 죽어간 선배들의 역사가 서려있다. 1945년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의 투하로 인해 무조건 항복을 하였던 일본은 1947년에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기 전일에 최후의 천황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공포했다. 1952년에는 외국인등록법과 출입국 관리령에 의해서 재일코리안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인 외국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大東亞共榮圈의 일본인으로 취급하고 민족 고유의 이름도 언어도 빼앗던 일본이 차별과 편견의 외국인등록증 常時携帶와 지문의 압날을 강요하여 왔다.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는 1980년대부터 지문압날의 철폐운동을 양심있는 교회와 세계 교회와 연대하여 전개해왔다. 그러한 운동의 결과 일본에서 지문압날제도가 폐지되었던 2000년4월1일에 뜻을 같이했던 형제자매들은 주를 향해 찬양의 새 노래를 불렀었다.
일본 땅에 있는 재일코리안들은 성서를 읽을 때에 놓여진 상황에서 특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성경의 구절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특히 출애굽기12장 이하에 나타난 유월절의 장면과 출애굽기14장의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른 찬양의 소리를 연상해본다. 이어 한 여인의 고통을 그린 사무엘상1장에 나타난 한나의 설움과 아픔 속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으로 사무엘의 탄생과 그 기쁨의 찬미 소리가 이땅에서도 들리는듯 하기도하다.
최근에는 많은 기독교단체와 협력하여 외국인주민기본법 제정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법이 일본 땅에서 제정됨으로 인해 외국인이 살기 좋은 일본은 일본인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는 희망을 안고 있다. 희망을 가지고 언제인가 외국인주민기본법이 제정되는 그 때에 우리는 또 다른 새 노래로 주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리라 믿는다.
작년 말에는 도쿄교회를 중심으로 한 재일대한기독교회에 소속된 유학생들과 일본에서 태어난 2세, 3세의 청년들이 마하나임이란 찬양 팀을 조직했다. 습관및 언어등의 문화가 다른 배경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찬송을 연습하며 좋은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에 심히 좋았다. 작년말에는 청년전도 대회및 찬양집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도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새로운 비젼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해본다.
1-3. 재일대한기독교회의 교육적인 과제
재일대한기독교회는 2008년이면 일본땅에서의 선교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일본 땅에서 북동아시아의 안전과 평화, 상호 교류에 대한 역할 수행의 비젼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바라는 교회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의 잘못을 잘못으로 명확히하며, 또한 역사의 과정을 분석하여 그것을 극복하여 가는 인간이해, 관계이해, 사회이해를 깊이하려고 여러모로 활동하고 있다.
단지 과거의 역사를 확인만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전망해 가는 진정한 연구가 되기 위해서 정치적인 논리나 경제논리도 아닌 보편적인 세계상으로의 자극이 필요하다. 모든 상이점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동등히 부여된다는 하나님의 공평성을 전할 수 있는 교회로서 열의와 의지를 기울여 가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재일대한기독교회의 교육은 단지 성서의 지식을 교육하는 것만이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관계의 교육신학으로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갈 인간의 성장을 과제로 하는 교회로서 역사교육의 진정한 모습을 제안하는 교육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떻게 지역 주민들과 연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와 함께 어떠한 관계를 제안할 것인가를 포함한 공생의 역사와 텍스트를 구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오랫동안 거듭되어 온 사건을 일회용에 그치는 대응차원을 넘어서 공동의 인간상과 세계상의 제안에도 이어지는 작업이지만 그러한 커다란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의 나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1923년9월1일에 발발한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과연 얼마나 많은 재일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고 유족들로부터 소식이 끊긴 채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가? 그리고 전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권에서 제외되고 차별받아온 재일동포들의 존재를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조국 땅에 가서 살 수도 없는 상태의 주변인(Marginal)이라고 불리는 재일코리안들은 일본사회에서 동화를 강요당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일본사회에 있어서 다문화 다민족의 공생사회를 제안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치는 재일 외국인을 일본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처우하며 어떠한 권리 보장을 하여 왔는가를 통하여 개방성과 성숙도를 확인하는 명확한 시금석인 것이다.
일본에 재류하는 외국인의 역사적 경위를 갖는 재일코리안의 비율이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차별과 배외성은 아무런 변화가 없고 공생의 테마가 아닌 관리의 테마로써, 주민과 시민의 관점이 아닌 값싼 일회용 노동력과 로테이션 노동력의 관점으로 일본 정부는 재일 외국인을 보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일본사회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황국사관을 표방하는 시대이며 다른 편에서는 유사법안(전시법제)가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전쟁준비로 향하는 시대에 그와같은 역사적 의미가 떠맡겨진 재일코리안의 존재를 평화구축의 중심적인 존재로 인식하여 거기에서 생성된 말과 꿈을 내세우며 공유하는 전쟁과 차별을 거부하는 교회의 신앙을 가시화 할 교육이 필요하다.
전쟁을 막고 평화에의 희망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북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관한 교육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도 단지 안보나 경제의 틀이 아닌 사람들의 생활, 교육, 교류의 과제로써 구상되어야 한다. 이 경우, 북동아시아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소수자로서의 상징적인 재일 코리안의 존재를 어떻게 중심에 둘 것 인가가 중요한 시점이 되리라고 본다. 기류민의 인권 인격권, 생활권 보장의 테마는 기류민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지역 전체의 시금석도 된다.
2. 「共生」、「共育」、「共創」의 敎育宣敎
2-1. 위해서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의 시점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로마서12:15)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
더불어 함께 살아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他者를 배척하고 差別하며 혹은 利用, 착취하는 状況이 분명히 存在한다. 그 위에 배척과 差別, 利用과 搾取라는 구조로 고정되고 肥大하여진 현실도 존재하고 있다. 한편 개개인이 悪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他者에게 좋으리라 생각하여 한 主観的인 善意가 반대로 他者에게 침해를 끼친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보호나 부양의 이름 아래에 어린아이로부터 自己決定의 自由를 빼앗고 女性을 家庭에만 붙잡아 매고만다. 혹은 専門的인 수단이 必要하다고 하는 名目으로 장애자인 아이들의 삶의 場을 한정하고 노인이나 병자를 병원이라는 시설에만 가두어 두는 일이 우리 주변에 많이 산재해 있다. 또 福祉社會의 이름 아래에 生活上의 장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施設에 가두어두는 善意는 自己 中心的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도 어린아이가 福祉나 環境, 국제적인 交流등에 접하는 폭넓은 世代의 多様한 시민을 대하게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知識의 量을 경쟁했던 대학입시 위주의 학교수업은 사회에 관한 프로세스를 배우는 場으로 교육하는 법을 다시 생각하였으면 한다.
教育이 다만 입시 지옥의 현장에서 경쟁하는 「競育」이 되고 함께 살기위해서 「共育」을 잊어버린 교육의 現状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어린아이를 祝福하는 형태의 교육을 취하고 싶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같은 자들의 것이니라고 하였다.
進化論이라든가 人本主義 教育의 향수(노스탤지어)에 붙잡혀 있는 教育 관계자의 눈에는 非合理的인 발상과 같이 생각될지는 모르나「관계중심의 교육」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中心으로 「너」와「나」의 관계를 構築하고 그것을 토대로 함께 배운는「共育」과 함께 만드는「共創」이란 目標가 있다.
秩序나 神의 戒律을 중히 보는 立場에서는 「混乱」이며「공동체의 붕괴」로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教派의 教育을 보아도 多様한 가치의 共存을 인정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교육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떻게 공존과 연대감을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더불어 함께(with) 살아가는 교육이야말로 참된 「共育」이요「共創」으로 可能케 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for)가 아니라 「개체」가 존중되어지고 내일의 일을 내다보고 듣는 일을 목표로 참된 공생 교육을 이루어 가야겠다.
2-2. 어린아이 예수의 모습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2장51-52절)
5월5일 어린이날인데 한국이나 일본의 공통적인 祝日이다. 어렸을 때에는 일년365일이 어린이날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른들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어린이날이 따로 정해져 있는가라고 느껴진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가기를 바라고 있는가?
지금의 아이들은 급격한 사회 변동의 흐름과 정보 홍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컴퓨터나 미디어를 잘 다루어 정보를 선택하고 취급하는 힘을 기르게 하려고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지닌 어른들이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학교에서도 컴퓨터나 미디어에 대해 가르쳐 가정에서도 서로 이야기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러한 대화를 통해서 아이들은 성장해 간다.
그러나 텔레비젼이나 컴퓨터 게임이라고 하는 하나의 미디어에만 빠져 있는 것을 막으려면 여러가지 즐거움을 체험하도록 어린이 문화의 형성으로 아이들을 위한 연극회나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즐기는 놀이나 야외에서 자연을 즐기는 게임 등 폭넓은 활동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가족 공통의 체험으로서 마음 속에 남게되어 각각의 가정에서 길게 화제로 되어 갈 수 있다.
부모와 아이들이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할 테마 중에는 텔레비젼이나 컴퓨터 게임의 미디어에 대해서도 증가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컴퓨터 게임을 시켜도 되는가, 시키면 않되는가? 휴대용 전화를 갖게하는가 갖지못하게 하는가? 부모는 고민하는 중이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아이에게 설명해서 가족끼리 서로가 룰을 만들 수 밖에 없다. 텔레비젼을 보지 않는 날을 만드는「노우 TV 데이」의 운동도 퍼져왔다. 어느 가정에서는 텔레비젼을 바보상자라고 표현하면서 아이들이 보지않도록 장려한다고 한다.
오늘의 현실은 이웃의 어린아이들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총무성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15세미만의 인구가 1,801만명으로 22년간 연속으로 어린아이의 인구가 감소되고 있다. 총인구의 비율로는 14.1퍼센트에 해당된다. 1950년에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총인구의 3분의1을 넘었었는데 현재는 아이들의 수는 점점 줄어가고 고령화시대의 일본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이런 추세를 보이는 날이 멀지않았다.
또한 오늘날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얼마만큼 거룩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인 하나님의 집을 찾게 하고 있을까?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라는 말때문인지 서울시의 어느 지역엔 열성 부모 덕분에 집값 학원비 과외비가 하늘 높은 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아이들 학교 문제 때문에 이사했다는 소리는 들어보았어도 아이들의 신앙 때문에 이사했다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의 어린 시절에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이면 함께 예루살렘을 찾아갔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거룩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서 어린아이와 함께 시간을 나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누가복음2장에 묘사된 말씀에 나오는 어린 예수는 참으로 모범적인 학생임을 볼 수 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니라는 말이다. “듣기도, 묻기도” 하는 어린이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에게서 질문을 들어본지 오래되었다.
아기 때에는 그렇게도 많이 묻던 아이들이 어느 사이엔가 입을 닫고말았다. 궁금한 것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물어봐야 대답이 뻔하니까 그럴까? 묻는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대답도 할 줄 알고 스스로 깨칠 줄도 안다. 듣고, 묻고, 말하는 능력은 깨달은 자가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 아이들도 깨달음이 커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받는 사람이되면 좋겠다. 그리고 사랑받기만 하지 말고 사랑을 베푸는 것도 함께 배우며 자라갔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에게도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2-3. 준법정신과 공동체 교육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7:10)
학교의 복도에서 기분좋게 뛰어 달리다가 호랑이 선생님에게 야단맞고 집에서는 남동생과 싸워 엄마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누구에게도 잔소리나 제재를 받지 않는 세계가 있으면 좋은데라고 초등학생의 여자 아이는 생각했다. 그날 밤에 그녀는 꿈을 꾼다. 정말 좋아하는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기, 만화나 CD도 자유롭게 손에 들어 온다. 거기는 룰이나 법률도 없는 세계였다.
그런데 크게 만족하여 집에 돌아가려고 하자 자기가 살던 집의 온 마을은 쓰레기더미로 넘쳐 있었다. 거리의 자동차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 평소에 자기가 선호했던 만화나 비디오 그리고 CD를 전부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비영리 단체가 만든 초등학생 전용의 법교육의 교재의 한 토막이다. 이 이야기를 소재로 아이들은 교실에서 생각게 된다. 「이것을 해 주세요」라고「이것을 해선 안 된다」라고 하는 룰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왜 그렇게 명령할 수가 있는 것인가. 누가 타인을 움직일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주변의 사건으로부터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가치나 생각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준법정신 공취를 위한 법교육이다. 미국에서는 법률가들이 교실에서 교사와 함께 수업을 하는 등의 운동이 정착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의미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를 수가 있다.
일본에서도 변호사나 교사가 법교육을 학교 현장에 채용하려고, 미국의 교재를 번역하거나 직접 법률가를 교실에 초빙해 수업을 하거나 하면서, 실현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규제 완화나 시장 경제화의 확대는, 행정 지도 등 불투명한 세계를 좁히는 반면, 약육강식의 경향을 강하게 해 정보에 대해 뒤떨어진 사람에게 불리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법적인 생각이나 지식을 몸에 익힐 필요가 늘어나고 있는 현대인의 삶을 간과할 수 없다.
소년 범죄의 사건에도 사회가 주목을 하고 있다. 죄를 범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 피해자나 가족이 받는 마음의 상처는 어떠한 것인가, 평상시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배심원 제도 재판원 제도가 도입되면 시민이 피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묵비권이나 무죄 추정의 의미를 교실에서 배우는 일도 필요하게 된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도덕이나 사회과의 수업으로는 충분히 가르칠 수 없었던 분야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 결단해, 그것에 책임을 진다. 그렇게 자립한 개인이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 법교육은 그것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정부나 국회의원에 모든 일을 맡긴채로 국민은 관객석에 있는 기분이 되어 있는「민주주의에 일체를 맡겨라」는 의식을 종식시키게 할 것이다. 준법정신 고취를 위한 법교육라는 말자체가 아직은 우리에게 친숙해 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3. 일본선교의 가능성
3-1. 이방 땅의 나그네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립보서3:20)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이었음이니라(출애굽기22:21)
3년전에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일본인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미야가와라는 목사님의 초대를 받아 가족과 함께 뉴라이프쳐어치라는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오오사카에서 태어난 아내와 딸과 아들 우리 4명의 가족은 함께 그곳을 방문하여 좋은 경험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는 일본인 교회도 고령화 사회가 되어 2세나 3세의 젊은이들은 모두 영어부예배에 참석을 하는 형편이었다. 일어부예배는 고작 20여 명인데 영어부 예배는 200여명의 인원이 모여 같은 시간에 예배를 나누어 옆에 있는 다른 넓은 챠펠에서 드리고 있었다. 옆에서 드럼 키타의 찬양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일본어예배에 임하게 되었다. 처음의 인상으로 그들은 우리들의 가족을 한국인 코리안이기는 하나 일본에서 왔으니 따뜻하게 환영을 해주는가보다라고 생각했었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이분들이 참으로 반갑게 우리들을 맞이하여 주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일본에서 온 자기들의 친척을 대해주듯이 우리를 맞이하여 준 것이다. 사실 언어 면에서 아내와 아이들의 쓰는 일본어는 100퍼센트 일본인과 다를 바가 없는 완벽한 일본어라는 점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들 가족을 환영해 준 다른 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도 이방 땅의 나그네 삶 속에 같은 아픔을 겪어왔구나 하는 점이었다. 그분들중에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 생활을 했었고 심한 차별을 받아왔다는 것을 대화 속에서 알게 되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어릴 적에 자기의 부모가 배려해 주어서 일본으로 귀국하여 일본의 중학교에 다닐 때 당했던 이지메(왕따)의 경험도 말해 주었다.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래도 부모는 모국이라고 일본에 보내 주었건만 학교의 학생들이 미국인 티가 난다고 매우 놀려대며 심한 차별을 일본에서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러한 말을 들으면서 나는 여러분의 체험담은 현재의 재일코리안의 모습과 너무 흡사한 데가 많군요라고 말했다. 그분들은 일본에 사는 재일코리안은 우리들과 같은 처지라고 하면서 마치 같은 동포를 만났다는듯이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었다.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코리안 /일본인 이라는 감각을 잊은 채 외국의 이방 땅에 사는 나그네로서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나누는 간증의 시간을 식사 시간에도 공유할 수가 있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결코 하나로 클로오즈업이 될 수 없는 듯한 두개의 국적이 미국 땅의 이방 나그네로서 만나게 될 때 국적의 벽이 없어 지고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이야기 가운데 두분의 노인이 같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시에 우리들은 서로 적으로 싸웠답니다 라는 말을 해 주었다. 한 분은 일본군으로 한 분은 미국 군인 으로 전투했던 사이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교회에서 주님을 믿으면서 즐거운 신앙생활을 나누는 친구라면서 말을 해 주는 것도 인상깊은 일이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 가운데 여호와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사람들이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언어 소통 이 안되는 인간이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로 그 말이 다르고 국적이 다른데도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가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다양화되면서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고마는 우리들로 보이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열쇠는 역시 성서 가운데 숨기워있다고 본다.
3-2. 참된 지혜를 지닐 수 있는 교육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열왕기상3:9-10)
중학생들이 즐기는 만화나 게임센터의 장난감들의 내용이 마음에 걸린다. 사람을 때려서 부상을 입히거나 죽이는 장면들이 너무나도 많다. 부모로서 어린아이들이 생명의 귀중함을 잘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오사카시의 꽃박람회 기념공원에서 작년 2월에 홈레스인 노숙자 4명이 소년 그룹에게 습격을 받아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경찰은 자진 출두해 온 소년등 17명중 오사카 시내의 고교3학년의 남학생과 공장직원, 무직의 소년 3명을 상해 용의로 체포했었다.
소년들은 홈레스인 노숙자와의 사이에 말싸움이 있어서 보복을 하기 위해 습격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고 한다. 녹지 공원 내의 휴게소에서 자고 있던 남성4명을 쇠파이프로 때려, 노숙자인 남성(59)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1개월의 중상을, 그리고 다른 3명에게도 머리나 팔에 부상을 입힌 혐의이다.
나는 이 사건과 동시에 게임룸 장난감의 버튼을 리세트하면 몇번이고 등장인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 게임기 안에 있는 허구의 생명에 익숙해진 어린 아이들을 연상하게 되었다.
이런 아이들에게 생명의 귀중함과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을 어떻게하면 실감나게 전할 수 있을까? 먼저 생명이 있는 것과의 만남이다. 토끼등의 애완 동물을 기르는 일이나 식물을 재배하는 일 혹은 자연 속에서의 활동에 참가하는 일을 통해서 직접 여러가지의 생명체와의 접촉을 통하여 체온의 따뜻함을 느끼는 일도 중요하다고 본다.
때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엄숙한 장례식 죽음의 자리에 입회하는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실감을 하는 기회가 된다.
또 보육원이나 양로원의 자원봉사에 참가함을 통해 성장과 삶의 중요성을 체험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하여 더욱 깊이 그리고 좀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기회를 어린아이에게 지닐 수 있게 하는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철저한 교육이념을 세워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리는 시대가 되었다. 구약의 다니엘서에「많은 이가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바삐 왕래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오늘의 현실이 되었다. 지금은 무엇이든지 「빨리 빨리」라고 하는 가속화 시대가 되었다. 역사변동의 속도가 고대와 비교해서 100배를 넘는 오늘이 되었다고 영국의 역사가 G.M.Trevelyan은 말했다.
특히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오늘날을 「정보화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정보와 지식의 무지혜화」와 지식이 악의 단순한 도구로 전락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증가하는 정보 지식과 감소하는 지혜의 문제이다.
지식이란 총체적으로 조직하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요구하여 얻는 판단의 체계이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적절한 처리를 하는 능력이다. 지혜에 관한 구약의 유명한 인물중에 솔로몬 왕이「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구한 기도는 구약성서 열왕기상3장9절에 나온다. 이 분별력을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discerning heart , understanding heart)
지금은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동시에 편리함을 만끽하지만 공백 상태 속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할 위험도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여기 교육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운동의 확산이 오늘날 이 세상을 올바른 방향 즉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전환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미래의 비젼으로서의 교육은 「神中心의 세계관 교육」 이다.(이사야45:5-7) 그 과학적인, 경제적인 사고, 정치적인 역사적인 사고에 있어서 번져가는 영향을 생각하며 지금이야말로 神中心의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교육을 해나갈 때이다. 이는 바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비젼을 안겨주는 (마태6:33) 교육이다.
3-3. 야생 원숭이의 마음을 누가 알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한 복음21:16)
아사히신문에 나온 기사 중에 “사람이 주는 먹이로 낚을 수없는 원숭이의 마음”이란 글을 읽으면서 몇해전에 오오사카 북쪽에 있는 "미노"라는 공원에 유학생들과 야외예배를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교오또에 있는 입명관대학에 유학온 학생 부부의 어린아이가 과자봉지를 들고 공원에서 놀다가 갑자기 달려온 야생 원숭이에게 과자봉지를 빼앗겨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리며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원래 원숭이는 나무 열매를 채취하여 먹고 사는 동물인데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살다보니 나무열매를 채취해먹는 노동보다는 던져주는 먹이에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즉 일할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그러한 원숭이가 새끼를 낳고 또 자라서 그 다음의 새끼를 낳다보면 손자원숭이 대에서는 일하여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보다 자기보다 연약하게 생각되는 여자나 아이의 먹을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먹이를 빼앗는 강도원숭이가 되고만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먹이를 던져달라고 보채고 요구하는 거지원숭이로 전락해서 일생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이런 거지원숭이나 강도원숭이에게 있어서는 먹이를 주지 않는 인간이 나쁘다고 보기에 훔치거나 빼앗는 행동을 하게 된다.
지금 일본의 산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다.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개나 고양이와는 달리 야생동물은 눈앞에 보이는 먹이를 먹어도 좋은지 나쁜지를 분별하지 못해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음식물 찌꺼기나 먹이를 야생동물들이 먹게 됨으로 점점 더 먹이를 구하려는 본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야생동물에게는 먹이를 공급하지않고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이러한 파괴되어 가는 야생동물의 생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되짚어보지 않을수 없다.
경제회복의 대명제를 등에 업고서 예외없는 규제 완화를 통한 시장원리의 관철이라는 일련의 조류는 오늘날의 사회, 경제의 모든 것을 휘감아 크나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진행되고 있다. 교육과 관련된 문제도 예외없이 이 소용돌이 속에서 위급한 사태가운데 이르게 되었다.이러한 정황가운데서 교회는 교육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독교나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사랑이요 자비의 마음이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인데 오늘날의 상황은 사람들로부터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소멸시켜 나가고 있다. 그대신 탈취해도 된다는 정신구조가 일반화된 사회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취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려도 된다는 마음을 은연중에 심어놓은 사회구조로 인하여 이런 어른들의 심적상태를 보고 자란 어린아이들도 이윽고 어른이 되면 같은 맥락에서 자기 아이들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교육시키고 있다. 이렇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요구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하게 상실된 상황으로 변질되어감을 우려 한다.
이러한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내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며 우리가 어떤 것을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자.
나가는 말
1) 공생을 위한 역사교육
한일관계가 북동아시아와 세계의 안전과 평화, 교류에 대한 역할 수행의 비젼을 가지고 지속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의 잘못을 잘못으로 명확히 하며, 또한 역사의 프로세스를 분석하여 그것을 극복하여 가는 인간이해, 관계이해, 사회이해가 제안되어야 할 것이다.
단지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양국의 역사가들이 책상머리를 맞대는 것도 아닌, 미래를 전망해 가는 진정한 공동연구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논리도 경제논리도 아닌 보편적 세계상으로의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하늘나라의 즐거운 잔치에, 모든 사람이 서로의 상이점을 초월하여 부여된다고 하는 단적인 비젼(이미지)을 전할 수 있는 교회가, 지금 정체되어 있는 공동 연구와 그 외의 교섭 테이블에 열의와 의지를 기울여 간다고 하는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교회교육, 성서교육이 단지 성서의 지식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인간교육 이며, 하나님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인간 교제의 교육(관계 교육)이므로, 아시아를 함께 짊어지고 갈 인간의 성장을 과제로 하는 교회로서, 교회가 역사교육의 진정한 내막을 제안해야 한다.
교회가 시민과 어떻게 연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와 함께, 과거의 역사왜곡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관계를 제안할 것인가를 포함한 아시아 공생의 역사와 교회 텍스트를 구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오랫동안 거듭되어 온 역사왜곡 사건을 일회용에 그치는 대응차원을 넘어, 교회 공동의 인간상과 세계상의 제안에도 이어지는 작업이지만, 그러한 커다란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미 서로의 나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일 것이다.
2) 역사교육을 통해 극복해야 할 멘탈리티
- 2002년/ → 소위 [납치문제]에 노출된 일본인의 정신성 –
2002년 9월 17일 조일정상회담에서 밝혀진 납치문제는 확실히 일본사회를 크게 뒤흔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커다란 충격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이 있다. 일련의 납치문제 보도는, 당초 조일회담의 테마였던 아시아 평화에의 공헌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을 뿐 만아니라 일본의 과거 침략에 대한 반성, 사죄와 배상에 대한 일편의 자기 심문도 없는 사실은 놀라움의 경지를 넘어 분노를 느끼며, 나아가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커다란 충격이다.
슬픔에 직면하여서도 그것의 해명과 해결을 요구하는 감각이 있다면 그와같은 감성과 정의감을 가지고,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며,사죄와 국가에 의한 피해자 배상의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을 것이다.
관동대지진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고 유족들로부터 소식이 끊긴 채로 지금에 이르고 있는가. 강제연행과 강제 군대 위안부는 사실상 납치,감금,고문, 처형이 아닌가. 그리고 전쟁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권/사회권에서 제외되고 차별받아온 재일코리안 들의 존재. 조국에 돌아갈 수도 없고, 또한 자유로이 왕래도 할 수 없는 상태의 재일 코리안들에게, 동화 아니면 배제라는 가혹한 선택을 강요해 온 일본정부는 무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강권이 아니면 그 무엇인가. 그리고, 전혀 당치않은 일이지만, 재일 조선인 학교의 어린이들이 9월 17일 이후, 악질적이고 저질스런 놀림과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일본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배외주의가 드러난 듯한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이며 전체주의적,폭력적인 배외주의는 전시중에 그 침략전쟁을 가능케 한 본질이며 또한 멘탈리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재일 코리안의 역사와 존재는,지금,그 아픔과 고뇌를 또 다시 온 몸에 받으며, 눈물과 절규로 일본사회의 변함없는 배타적 체질을 역력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납치소동과 연쇄하여 재일동포의 어린이들에게 행사되는 박해와 같은, 재일 코리안을 공생하는 파트너로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는 동떨어진 사회인 것을 드러냈다.
일본사회에 있어서 다문화 다민족의 공생사회를 제안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치는, 재일 코리안을 일본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또한 어떻게 처우하며, 어떠한 권리 보장을 하여 왔는가 라는 질의를 계속하며,그 실태에 관여하여 가는 것이 일본사회의 개방성과 성숙도를 확인하는 명확한 시금석인 것을 재차 제기하고 있듯이 생각된다.
일본에 재류하는 외국인의 총수에 대한 역사적 경위를 갖는 재일 한국/ 조선인의 비율이 낮아졌다해도,일본의 차별/ 배외성은 아무런 변화가 없고, 공생의 테마가 아닌 관리의 테마로써, 주민/시민의 관점이 아닌 값싼 일회용 노동력/ 로테이션 노동력의 관점에서 외국인을 보고 있을 뿐이다.
3) 유사법제(전시입법)시대에
①전쟁준비시대와 새로운 국적선별시대의 도래
참정권 문제가 논란되고 있는 중,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져널리스트들은 만약,일본과 한국, 일본과 북조선이 전쟁상태에 돌입했을 때, 재일 한국/ 조선인은 누구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고 생각하는가? 참정권문제는 그와같은 본질적인 문제이므로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해 왔다.
논리의 무모함은 접어두고라도, 전쟁과 국적을 같이 거론하는 논리는 강하게 남아있다, 라고 하기 보다는, 전쟁이란 이와같은 분단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일본사회는, 한편에서는 새로운 황국사관을 표방하는 시대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유사법안 (전시법제)가 등장하는 시대이다. 일본은 지금, 전쟁 준비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전쟁 준비 시대는,새로운 국적에 의한 분단과 선별 시대의 도래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국적에 좌우되지 않는,사람들의 교류의 장,국적을 초월한 사람들의 프렛트홈 이며,그와같은 공생사회의 창설,분단될 필요가 없는 역사 형성의 견지에 서서, 일본의 유사법제에 반론하며 이것과 투쟁하여, 나아가서는 남북의 냉전과 군비문제를 풀어갈 것을 제안해야 할 것이다.
②재일 코리안은 어떤 의미에선 역사의 부산물로 역사를 짊어지고 있다. 전쟁 준비로 향하는 시대에, 그와같은 역사적 의미가 떠맡겨진 재일 코리안의 존재를, 평화구축의 중심적인 존재로 인식하여, 거기에서 생성된 말과 꿈을 내세우며 공유하는 전쟁과 차별을 거부하는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신앙을 가시화 할 필요가 있다.
전쟁을 비현실화시켜 평화에의 희망을 리얼한 것으로 하기 위한, 북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 관한 협의는 지금부터 가장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정치 /외교문제이다. 그렇다고는해도 그 협의가 단지 안보/경제의 틀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교육, 교류의 과제로써 구상되어야 한다.
이 경우, 북동아시아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마이놀리티의 상징적인 재일 코리안의 존재를 어떻게 중심에 둘 것 인가가 중요한 시점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겔/기류자]의 인권, 인격권, 생활권의 보장의 테마는 기류자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지역 전체의 시금석도 된다.
4) 終末의 날에 나타난 하나님의 후한 처사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태20:15)
나는 성탄절과 아울러 年末을 맞이할 때에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역사의 종말, 인생의 終末을 연상하곤 한다. 그런데 종말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 個個人의 문제에 비춰볼 때에는 불안과 두려움도 엄습해 오곤 한다. 그것은 죽음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 속에서 저질렀던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드러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태복음20장1절~16절에 나타난 천국의 비유인 <포도원의 노동자> 비유 말씀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다루어 주시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포도를 수확하는 계절을 맞이하여 포도원의 주인은 품군을 얻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섰다. 질 좋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는 포도송이가 충분히 익어야 하나 동시에 너무 익기 전에 따야만 한다. 포도 수확은 일각의 유예도 있어선 안된다. 그러기에 많은 품군이 필요한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몇번이고 장터에 가서 품군을 고용한다. 여기서 예수의 시대에도 실업자가 있었고 노동자는 생활을 위해서 임금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녁이 다되어 해가 기울어지는 오후5시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섰는지라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섰느뇨>라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한 이들이 노인이었는지 병들어 있는 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보기에 품군으로 쓰기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듯한 사람들이었던 것같다. 그러나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말해 주었다. 여기서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노동의 생산성보다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을 지적해주고 있다.
그런데 해가 저물매 품군을 불러 품삯을 마지막에 들어온 자부터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그 때 노동을 했던 모두의 눈이 주인의 손에 집중이 되었다. 아니! 마지막에 들어와 겨우 한시간만 일한 품군에게 하루치의 임금인 1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이 아닌가! 주변의 품군들 사이에 흥분된 분위기가 나돌았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들어와 땀흘려 고생하며 일한 품군들의 마음 속에 당연히 자기들은 몇배 더많은 품삯을 받을 수가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나누어 준 것은 오직 1데나리온 뿐이었다. 그들은 흥분하여 심히 노하며 주인을 원망하며 불평을 터뜨렸다. <마지막에 들어온 자들은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소이다. 뜨거운 태양 빛 아래서 땀흘려 고생하며 일을 하루종일 한 우리에게 저들과 같은 대우를 한단말이오> 그것은 열심히 일한 자를 희생시키는 일이요 게으른 자들을 우대하는 주인의 변덕스런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인은 말한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1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내가 다른 연약한 자에게 후하게 줌으로 네가 질투하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능률화, 조직화, 합리화, 효율화라고 하는 목표 지향의 현대 산업 구조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을 읽을 수 있다.
포도원 집주인인 하나님이 약속한 하루의 품삯인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義 즉 예수님 그 자신이었다. 아무런 일도 못한 무익한 자라고 여겨지는 자에게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아무런 공로도 없이 무익한 종과 같이 생각되는 자를 죄인인 그대로 그리스도의 속죄,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받아들여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후한 처사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 예수는 우리들 하나님 아버지의 본질을 계시해 주셨다. 역사의 終末에 나타나는 그것은 <하나님의 후한 처사>이다.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박수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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