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미래(김근수 목사)
김성수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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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미래
(이 설교는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세계선교회)발전을 위한 지역 선교부 포럼
(지난 7월 12-13일, 충주 켄싱톤 리조트) 저녁집회의 설교 내용입니다)
설교/ 김 근 수 목사 (한울교회 담임)
본문 / 시 22:1, 27-29
선교는 투자할만한 일입니까? 어떤 이들은 선교의 투자가 적합치 않다고 합니다. 지구촌에서 종교분쟁과 충돌이 더할 것이라고 선교 연기론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선교 무용론이나 폐지론까지 사실상 언급하고 있습니다. 종교간의 화해를 해야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급진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종교의 차이는 문화권의 차이에 지나지 않으므로 한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절대 구원관(행 2:21; 4:12)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선교는 불필요합니까? 그러므로 선교의 미래는 불확실합니까?
Ⅰ. 그러면, 과거에 나타난 선교는 어떠합니까?
1. 성부 하나님의 선교는 아들을 희생한 선교였습니다.
오늘의 본문 1절에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마디 외침은 복음서 마태복음 27장 46절과 마가복음 15장 34절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는 이 시편이 유월절 양 잡을 때 부르는 노래로서 다윗 이후에 계속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예수님의 모국어인 히브리 방언 중의 하나인 아람어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 구절을 그대로 아람어로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마지막 운명직전에 이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이 외마디 외침으로써 백성들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던 것입니다. 이 노래는 그 시작이 고민과 고통, 고문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이지만 그 마지막은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돌아오는 즉 “모든 족속”이 메시야에게 절하는 메시야의 승리로 끝맺습니다. 그러므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 곧 하나님의 선교는 메시야이신 그 아들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양으로 내어놓으신 것을 보게 합니다. 불확실하고 불필요한 일을 위하여 그 아들을 희생시킬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버림받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왕따”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버림받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는 아내들이 날로 많아지고 이혼율이 높아갑니다. 자식에게 버림받은 부모의 슬픈 이야기로 듣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그 독특한 아들을, 그토록 사랑하시던 그 아들을 저주의 나무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렸습니다. 선교는 이같은 아픔과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미국 시카고에 소재한 휘튼 대학을 졸업한 두 형제 선교사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의 고산지대에서 원주민 선교중 산지족에게 희생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소속한 윀(WEC) 선교부에서 그 선교사님들의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알렸을 때 그 어머니는 “나의 슬픔은 큽니다. 그러나 더 큰 슬픔은 또 선교사로 보낼 다른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들의 희생이 없이는 선교는 어렵습니다. 아버지의 선교는 유월절 양잡는 일같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놓았습니다. 구약의 선교의 이야기에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내어 놓은 것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2. 아버지의 선교에 이어 아들의 선교는 자기 생명을 희생한 선교였습니다.
시편 22편에는 메시야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일곱가지 예언이 기록되었습니다. 메시야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자신의 희생을 유월절양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실 것과(1절), 사람들이 다 비웃으며(7절), 조롱할 것(8절), 극도의 목마름을 당할 것(15절), 수족이 찔릴 것(16절), 모든 뼈는 성하여 제물로서 손색이 없을 것(17절), 그리고 그 겉옷을 제비뽑을 것(18절) 등입니다. 이같은 예언은 약 일천년 후에 십자가상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시면서 대속의 재물이 되셨습니다. 아들의 희생적 죽음은 모든 선교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선교의 중심 메시지는 십자가의 구속과 그의 육체적 부활입니다. 불필요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같은 최고의 희생은 확실한 선교의 미래를 위한 선교적 투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선교의 재물로 드리는 순교자들이 여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님께서 쉬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스러 올라 오다가 관군의 공격으로 순교의 피를 이 땅에 뿌림으로써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Ⅱ. 미래에 나타날 선교는 어떠합니까?
1. 땅 끝까지 성령의 선교가 진행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선교명령은 본문 27절의 메아리입니다. 다윗은 메시야의 나라가 “땅의 모든 끝까지” 전파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지상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영원하신 왕, 왕 중의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가 영원히 임할 것을 사모했습니다. 지금도 이 영원히 설 나라가 임할 것을 사모하며, 소망하며, 아들을 내 놓으며, 생명을 내놓으며 선교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이 닿지 않은 나라와 지방이 많습니다. 동남아만 해도 미전도 종족이 8억 이상입니다. 우리들의 선교사들은 지금도 선교전선에서 몰이해와 불이익, 핍박과 납치 심지어는 죽음까지 당하면서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의 증인으로서 사명과 사역에 전력투구하고 있습니다. 땅 끝이 보일 날이 마침내 올 것이요, 바라기는 우리 한국의 선교사가 지구촌 마지막 동네에 십자가의 깃발을 꽂을 때까지 우리의 선교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같은 선교에 앞서 인도하시고 능력주시고 계십니다.
2. 제자들의 선교로써 모든 족속이 주님 앞에 절하게 될 것입니다(28-29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의 은둔처였던 한 다락방에 홀연히 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고 제자의 선교 시대를 여셨습니다.
1백 여년전 서구 선교사님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하려다 수없이 희생되었기에 이 땅의 백성들은 구원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다 구원받도록 선교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의 선교로 인하여 우리 가운데 운행하고 계십니다. 선교하는 사람과 교회는 성령이 충만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구원사역에 헌신하고 희생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됩니다. 교회를 키우시고, 축복하시는 이유는 선교! 선교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선교는 어려운 투자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야 하고 확대해야 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머리 둘 곳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땅끝 선교, 모든 족속의 선교에 깊이 동참하시는 성도들이 되심으로 축복에도 깊이 동참하게 됩니다. 미래의 선교는 고난은 있어도 실패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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