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가복음11:1-11 개역개정
-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마가복음11:1-11/2019.10.13.오후) 1. 마가복음 11장에서 부터는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갈릴리 지역에서는 많은 기적과 치유가 일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는 대부분의 기적의 역사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에서 제일 많은 고난과 수많은 대적에게 둘러싸여서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기적과 능력이 어느 때 보다 더 많이 필요했을 것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능력이 약해지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정치 세력인 산헤드린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면서, 그들은 불쌍한 군중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충동 질 하게 만들었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그기에 비례하여 많은 기적과 능력을 베풀어 주셨지만, 예루살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통계를 보면, 가장 복음화가 안 되는 지역이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이고, 가장 예수를 잘 믿는 지역이 전라북도입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전도가 어렵고 목회가 힘들다고 하는 지역이 경주, 제주도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는 더더욱 전도가 안되고 열매가 적은 이유를 우상숭배에 두고 있습니다. 그만큼 귀신의 활동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전도가 잘되는 지역이 있고 그렇지 못한 지역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이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 하실 때에는 많은 기적과 치유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순수했고 강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그만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최고 중심지였습니다. 다윗의 도성이었고 성전이 있었고, 경제, 정치, 종교, 역사, 교육 등 모든 것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해서는 대부분이 무관심이었고, 오히려 대적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빌라도가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두고 누구를 놓아주기 원하느냐고 하였을 때, 군중들은 바라바를 택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없애 달라고 했습니다(마27:15-26). 이것이 예루살렘 지역의 민심입니다. 사람들이 의를 버리고 불의를 택하는 것은 무지하고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흔들리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가장 어둡고 소망이 없었던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심으로 속죄의 은총이 이 예루살렘에서 부터 흘러나오도록 하셨습니다. 이유는 구약의 예언된 말씀의 성취와 더불어 그들을 더욱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본도 소망이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곳에 보내셔서 한국 교회의 선교지역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중에는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기대감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을 환호하던 군중들은 예루살렘의 사람들보다는 갈릴리에서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환호를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개인은 명철하고 판단력이 뛰어나도 군중은 그렇지 못합니다. 소문에 휩쓸리기 쉽고, 얄팍한 선동에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군중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힘은 비상식적인 쏠림의 현상입니다. 이것은 헌신이 없는 짧은 감동으로 끝나는 흐름일 뿐입니다. 21세기의 교회의 중심에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과 자발적인 헌신보다는 선동과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군중들의 쏠림 현상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기적과 능력이 사라지고 치유와 거듭남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 때의 예루살렘의 현상이 재현 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타려고 하신 어린 나귀에 관한 이야기가 11장의 서두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의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첫째는, 나귀를 구한 장소가 예루살렘 성 안인가 아니면 다른 지역인가 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맞은 편 마을로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 어린 나귀를 갑자기 구해 온 것인가 아니면 미리 준비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어날 상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신 것과, 나귀를 풀어 올 때에 "주가 쓰시겠다"는 이 말에 나귀 주인이 두 말도 없이 허락했다는 것은 사전에 준비된 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찌 되었던 지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 없이 순응하고 순종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거듭하시는 말씀 가운데 어린아이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 고 하셨는데, 여기서 어린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순진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지도자들부터 거짓말로 도배 질을 하고 거짓을 사실이라고 우기는 세상이고 보면, 매사에 의심 없이는 바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만, 믿음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감동하심에 순종 할 때 능력이 나오고 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이 넘치는 줄 믿습니다. 5.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면서 왜 어린 나귀를 고집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행하신 능력이나 사람들의 따르는 것과 지지하는 것을 보면, 백마를 타고 개선 장군처럼 그렇게 입성하셔도 충분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슥9:9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려는 이유는 그가 겸손한 것을 드러내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 말씀, 즉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면, 다윗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 답게 다윗 왕을 닮은 그의 후손으로 오셔야 마땅한 것입니다. 다윗 왕을 닮았다는 것은 그가 가진 통치권은 물론이고, 겸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자신이 가진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위협하고 군림하며, 때로는 속이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 가지 백성들 가운데 오심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6.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님 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 성취를 위해 어린 나귀를 타실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마치 종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내 기도에 일방적으로 응답해 주시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본문의 나귀 주인은 물론이고 8절 이하에 기록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자기들의 겉옷과 수고하여 벤 나뭇가지를 예수님 앞에 펴고 깔면서, "소리지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은 백성을 착취하고 고통하게 하는 헤롯 왕가가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종인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를 높이는 소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군중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환영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여 예수를 죽이라고 고함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7.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 성취 이전에 로마로 부터의 주권을 회복하는 해방을 원했고, 예수님이야말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그 뜻에 따라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기 때문에, 대중의 기대가 분노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믿는 자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사43:21) 했습니다.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마22:37절 이하에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사랑이고, 우리가 사랑할 대상은 두 가지로, 첫째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셔서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 자신 이외의 모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8.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참아주고, 사랑하기 때문에 원수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고 하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 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고 지지하는 갈릴리를 떠나 원수의 소굴 같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그곳에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신 것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이 세상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이제 부터는 우리를 통해서 일본 전역에 넘 쳐나기를 기대하며 말씀에 순종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의 사랑을 성취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