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가복음11:12-19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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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루살렘에서 본 것(마가복음11:12-19/2019.10.20.오전)
1. 1960년대, 미국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두 사람의 배우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마릴린 몬로 인데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면 케네디 대통령이 그녀를 초대하여 생일 축하까지 해 주면서 하는 말이, 너를 만났으니 지금 대통령을 그만 두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의 갈채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온갖 명예와 부귀를 다 누렸습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과 사귀면서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그 밖에 수많은 남자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으면서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원하는 것은 다 손에 넣었지만, 결국 인생의 공허함과 고독 감을 이기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마릴린 몬로와 쌍벽을 이루는 여배우 에반스 콜린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10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힐 정도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는 사랑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내가 그 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선택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결정을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와 결혼하여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어 미국을 떠났습니다.
안식년으로 7년 만에 귀국한 그녀에게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헐리웃의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선교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선교사의 이 자리는 영국 여왕의 자리도, 미국 대통령의 자리와도 바꿀 수 없는 자리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 처럼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버리고 십자가 복음의 전도자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명예나 부귀를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져서 전도자로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이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 귀하고 복된 일인지 잘 알고 여기에 생명을 걸고 사역 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 제목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본 것이라고 붙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에서 예루살렘의 사건과 배경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하는 사실이 더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중요한 사건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길 가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를 예수님이 저주해서 말라 죽은 사건이고, 둘째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그 안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며 분노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건을 객관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예수님을 매우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는지 알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신문을 읽을 때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 있듯이, 사물이나 사건이나 나타난 현상만 보지 말고, 그 이면의 배경이나 의도가 무엇인지 살펴야 진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길 가의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는지 가까이 가셨다가 열매가 없는 것을 아시고, 14절에는 나무에다 저주를 퍼 부었습니다.
그런데 12절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이 시장하셨다고 했습니다.
3. 그런데 원어를 보면, 이때가 새벽 쯤이었고, 예수님 일행이 집에서 일찍 출발하였기 때문에 식사를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열매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나무 가까이 가셨지만 열매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화가 나셨는지 그 나무를 저주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저주해서 말리 죽이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13절 끝에 보면 분명하게 지금은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유월절의 때, 곧 3-4월에 해당하는 계절이고, 무화과의 열매가 익기 시작하는 것은 5-6월이니,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열리면서 잎사귀가 무성해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때가 이르지만 일단 잎사귀가 무성하면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신 것은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이상한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속은 것을 아시고 그 나무를 저주하셨는데, 바로 이런 행동이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현 상황과 장차 될 그 결과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굉장히 경건한 척 하지만 실상은 사람을 감화 시키는 어떤 능력도 없이, 속에는 온갖 위선과 탐욕과 거짓으로 백성들을 속이고 그들 위에 군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은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4. 오늘날 우리가 불의와 온갖 거짓으로 탈선을 일삼고 있는 일부 정치, 교육,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서도 내 개인의 문제로 인하여 침묵한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19:40)고 하셨습니다.
불의한 행위에는 악하다고 말하고 선행은 복 되고 의로운 일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제가 20대 초반인 1974년에 당시 동아일보 광고란에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광고비를 받아 운영하는 신문사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고, 그 배후에는 동아 일보와 동아 방송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유신 정권의 탄압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온 국민들이 신문 하단의 광고란을 잘게 쪼개고 또 쪼개서 한 줄, 혹은 두세 줄 씩, 독자 개인들의 이름으로 신문사를 격려하는 광고를 싣기 시작했습니다.
광고 싣는 것이 1975년까지 유행병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탄압은 멈추었습니다.
그랬던 동아 일보가 과거의 명성은 간 곳이 없고 이제는 완전히 똥 통이 다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위선과 거짓으로 위장된 잘못된 신앙의 결과는 20절에 기록된 것처럼, 처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 된 신앙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속이고 그 다음에 남을 속이고 마지막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이 결국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망하게 만들고, 온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 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잘못된 지도자들의 죄악과 위선을 방치하면 나라는 순식간에 망하는 것입니다.
5. 그런데 마가복음 11장을 보면, 특이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11절과 19절에 기록한대로, 예수님은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지만, 한 번도 예루살렘에서 주무신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쓸데없는 부분에 고민을 하는지는 몰라도, 여기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잠시 보류해 두고, 그 다음에 나오는 사건은 15절 이하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지금까지 제자들이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는 예수님의 분노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목격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5절에 보니,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고 했습니다.
오래 전에 성지순례를 위해 이탈리아 로마 안에 있는 바티칸 로마 교황청을 들렀을 때, 그곳에서 물건을 사려면 달러나 이탈리아 리라를 바티칸 화폐로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는 크레딧 카드가 일반화되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환전을 한 후에 그림 엽서 등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반 세켈의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로마의 동전을 두로 동전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돈 바꾸는 환전상이 필요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드릴 제사의 희생제물도 성전에서 정하는 기준을 통과한 짐승만 받아주었기 때문에, 개인이 멀리서 끌고 오는 짐승 보다는 이곳에서 구입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전에는 짐승을 팔고 사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원래 성전 안에는 이런 이유로 인해서 처음에는 분명 예배를 돕겠다는 차원에서 시작된 장사였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이권이 개입되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6. 그런데 이 사람들의 상행위를 예수님은 뒤집어 버리시고, 그 사람들도 다 내어 쫓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17절에 보니,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사야서 56:7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시고 매우 분노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배를 조용하게 경건하게 드릴 수 없는 그런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의 분명한 목적인 기도하는 집에서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전을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고 더러운 거래를 하는 것 이전에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목적이 변경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강도라는 단어는 15:27절의 강도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이 사람들의 행위를 훔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며 우상 바알에게 예물을 바치는 그런 자들이 숨어들고 있는 소굴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이 그들을 보셨을 때에, 그들이 얼마나 악하고 뻔뻔스러우며, 예수님 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이 성전에서 세상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악한 자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습니까?
요즘 세상의 법이라는 것이, 법을 만들어 내는 국회는 물론이고, 그것을 적용해서 재판을 하고 있는 재판소의 실상을 보면, 이헌령 비헌령(耳懸鈴鼻懸鈴), 곧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사방에서 공의가 무너지고 진리와 의가 짐승 만도 못한 자들의 발 아래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들이고 보면, 예루살렘은 그들에게는 꿈의 도시이며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본 예루살렘은 그들의 꿈과 기대를 여지없이 짓밟고 무너뜨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타락한 소돔 성과 같았던 것입니다.
창19장에 나오는 소돔 성의 멸망은 그들의 죄악이 흘러넘쳐서 감당이 안 되는 것 보다는, 사실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구한 것은 창18:32절에서 소돔 성 안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이 멸망하면서 사방에 시체가 산을 쌓고 피가 강물이 되어 흐를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그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에 보니,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죽일까 궁리하고 의논했습니다.
이 사실을 요한은 증거 하기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요1:9-11) 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자신들의 더러운 이익의 재료로 삼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했던 이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8.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성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며, 우리와 가장 친밀한 대화를 원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성전을 통해서 우리와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본 예루살렘 성전은 자신들의 상상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원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기를,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란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3:7-8) 고 하였습니다.
세상 명예나 부귀를 따라가지 않고,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 반드시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축복하시고, 우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구원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굳게 서는 이 일이 나와 내 가정과 자녀를 살리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망이 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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