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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큰 것(마가복음12:28-34)
고영수 2020-06-10 추천 0 댓글 0 조회 333
[성경본문] 마가복음12:28-34 개역개정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인생에서 가장 큰 것(마가복음12:28-34/2020.1.26.오전)

1. 지난주에 미국 뉴스 월드 리포터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를 발표했는데, 그 중에 7위가 일본이고, 9위는 한국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전 세계 21,000명을 대상으로 각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국가의 영향력 등등이 세계에 미치는 파워는 미국이 단연 1위였고, 그 다음이 러시아, 중국, 독일, 영국, 프랑스 순위였습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세련되고 기술 발전이 뛰어난 나라로 그 점수가 9.8로 최고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한국은 일본과 닮은 점이 많으면서도 모든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약하고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약점으로 꼽혀 6.7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삶의 질에 관해서는 일본이 14위였는데 한국은 23위였습니다.
그런데 삶의 질이 높은 국가는 캐나다가 1위였고, 그 뒤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였는데, 특이한 것은 삶의 질이 높은 국가일수록 시민 정신이 높게 평가되었고, 그들이 전부 기독교 국가라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 하는 나라가 한국으로 알려졌는데, 이상하게 삶의 질이나 시민 정신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일반 사람들에게 신앙의 감화나 영적인 영향을 제대로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쓴 산상수훈의 머리말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난 수십 년 간 대한민국이 변한 것 이라고는 경제성장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다시 생각이 날 정도로 한국의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이유는 나라와 민족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십자가는 있으되 사랑은 없고, 말씀은 있으되 생명력은 없는 그런 교회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 미국은 다른 부분에 앞서가는 것도 많지만 눈길을 끈 것은 국가의 파워가 넘버원이었습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문제는 남 보다 뛰어나고 상대방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내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힘도 어떤 힘이냐, 그 힘을 어디에 사용 하느냐에 따라 가치와 결과는 많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아니 내 인생에서 가장 힘이 있고 영향력이 강한 것이 무엇이며, 내가 무엇을 소유해야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정치적 공세와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의 종교적 공세를 지혜로운 말씀으로 물리치신 후에, 이 모든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느 서기관의 질문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서기관의 질문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전통적으로 365개의 금지율과 248개의 명령 율을 더하여 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많은 계명들 중에 가장 가치가 있고 제일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를 놓고 오랜 세월 동안 논쟁을 해왔기 때문에,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을 듣고는 나름대로 분명한 답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두 가지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29-30절은 구약 신명기 6:4-5절에 있는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 뿐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 중에 첫 번째 부분의 내용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3. 유대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십계명에 기록된 이 말씀을 기도 문으로 암송 하면서도 그것이 가장 크고 첫 번째 되는 계명인 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공자 논어(孔子論語集)의 옹야편(雍也篇)에 보면,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지식으로 아는 것 보다는 좋아하는 것이 더 복 되고, 말씀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모하듯이 기뻐하며 즐기고 가까이 하는 것이 더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10) 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특히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밤낮으로 외우는 이 말씀이 계명 중에 가장 크고 귀한 것인 줄 알지 못했다는 것은, 탄식으로 그칠 수 없는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이 서기관의 질문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최고로 크고 귀하고 복된 일이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여러 가지의 신앙고백인데 그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가운데 소요리 문답의 제일 첫 번째를 보면, 「사람의 첫째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첫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기는 일입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신 구약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모세의 십계명의 제일 앞에 나오는 그 부분을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낭독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인 줄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입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달고 살면서도 마음에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제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거나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사는지에 의해서 결정이 나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흙으로 빚어진 처음부터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린양 처럼 돌보는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며, 전능하신 자의 손길에 붙들리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지킬 수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잘 아셨기 때문에 단순하게 서기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두 번째의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본문31절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이 스스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약 레위기 19:18절을 인용하신 것인데, 그곳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는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에 새겨진 내용으로, 이것 역시 그들은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면서도 이 말씀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야말로 그들에게 감추인 보화를 캐내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5. 유대인들이 정말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양식으로, 삶의 능력과 구원 받은 자의 감격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행일치의 삶을 살지 못하니 그저 종교 생활을 하는 위선자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두 가지의 계명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둘째로 인간에 대한 도덕적인 행위가 균등하게 서로 만나게 될 때, 그 지점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사람들은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위로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아래로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그들의 눈앞에 와 계시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공격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의 눈과 마음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미워하고 버리고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주로 받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서 받은 가장 큰 축복이고 은혜인 줄 믿습니다.

6. 참 예배자의 모습이란 어떤 것입니까?
거룩하신 분의 보좌 앞에 나와서 그에게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 우리의 삶 한 가운데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이것이 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들을 포함하여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알겠는데, 문제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스라엘은 같은 유대인들을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들은 개나 돼지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의 범위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눅10:29-37절에 보면,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들까지도 그 이웃의 범위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우리의 이웃에 대한 경계선입니까?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마리아인입니까? 아니면 더 멀리 있는 이방인들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은 우리가 제일 미워하고 싫어하고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원수였습니다.

7. 한국과 일본과 중국은 가까이에 있으면서 서로가 아주 불편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의 문제도 그렇고 2003년의 사스 문제도 그렇고, 경제며 정치며 모든 문제에서 불편한 것은 전부 이웃 나라를 탓하고 공격합니다.
얼마 전에 지소미아의 협정을 파기할 정도로 한일 간의 무역 문제가 심각한데, 양쪽 국가의 수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웃 나라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이웃에 대한 태도가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죽을 때까지 위선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관계가 왜 이렇게 되어야 합니까?
타락한 인간의 죄성은 남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사람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고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는 있어도, 이웃에 대하여는 사랑이나 희생은 생각만 해도 불편하고 화가 머리에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이 기다리고 그 만남을 즐기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한다면, 말씀은 우리를 변화 시키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은혜가 넘치면,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으며, 그것을 도리어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을 볼 때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생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결국에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인 줄 믿습니다.

8. 인생에서 가장 큰 것은 물질도 명예도 권세도 아름다움도 남녀의 사랑도 아닙니다.
이런 것을 가졌다고 가장 큰 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영원한 승리 자도 아닙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없어도, 우리에게는 이미 만물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요, 가장 강한 자요 제일 큰 사랑을 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신 이 사랑의 길을 우리가 뒤따라 갈 때, 세상에서 우리를 이길 자도  없으며 우리가 가진 사랑의 복음을 막을 자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강하게 만들고, 나라와 민족을 최강으로 세워 나가는 줄 믿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죽임을 당하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여 영광과 권능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으로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분을 본 받아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자체는 예배가 되며, 이 예배 안에서 우리는 마귀와 세상도 이기는 영원히 승리하는 최강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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