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고백(마가복음12:35-37)
고영수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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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마가복음12:35-3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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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다윗의 고백(마가복음12:35-37/2020.2.2.오전)
1. 최근의 주간 조선을 보니, 영국에는 젊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욜드족(yold-young old)이라고 부르는데, 연령으로는 노인이라도 체력이나 정신이나 삶이 노인으로 취급 받기 어렵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영국은 2011년에 이미 65살의 법적 은퇴 연령을 폐지하였고,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언제 은퇴 할 거냐고 물으면 실례일 뿐 아니라, 그것이 은퇴에 대한 압력으로 여겨지면 고소도 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세월로 나이를 드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나이를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긴 용어가 생리 연령과 주관 연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생리적으로는 65살이지만 내 생각에 아직은 50대 초반이라고 느끼면 그것이 그 사람의 나이라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보면 나이 먹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은데, 세상 사람들을 보면 지금까지는 나이보다 10살 젊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였다면, 요즘은 20살 젊어 보이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그래서 60대의 여자가 40대처럼 꾸미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네덜란드의 어떤 사람은 요즘 세상은 남녀의 성도 바꾸는 세상인데, 그래서 내 생리 연령이 69살이지만 내가 느끼는 연령은 20살 이상 더 젊으니 내 나이를 바꾸어 달라고 법원에 청원했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사람의 연령도 남녀의 성 조차도 타고난 대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그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자기의 부모 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이미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21세기의 세상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어떤 변화를 불러오지 않으면 머지않아서 우리의 삶에 심각한 문제나 혼란을 불러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던지 간에 흘러가는 세월을 인간의 힘으로는 잡을 수 없으니, 먹는 나이를 한탄하거나 늙어가는 나이에 지배를 당하지 말고, 늘 젊은 사람들처럼 건강하고 활기차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2. 우리가 마가복음 12장만 4주에 걸쳐서 강해를 하고 있는데, 오늘을 포함해서 2-3주 정도 더 소요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복음 12장에서는 계속해서 어려운 난제가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공세로 세금 문제나 부활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나왔는데, 오늘 본문의 질문은 이전 것 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35절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28절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이 또 다른 서기관의 질문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서기관들이 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점에서 다윗이라는 존재는 이미 1,040년 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30살 때인 기원전 1,010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하고 비교해 보면, 1천 년 이상의 나이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다윗 왕은 물론이고 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대하고 기다리는 분이 있었는데, 그가 다윗 왕가의 혈통으로 오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서기관들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기 때문에 다윗 왕의 자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이 일을 가지고 예수님은 어째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처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도리어 서기관들에게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3. 36절에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주목하신 것은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의 1절의 내용으로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 그기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 라고 되어 있는데,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지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자기 보다 더 높으신 주가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에 의해서 주라고 불리는 존재는 과연 누구입니까?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내 주」는 장차 이스라엘을 위해 오시는 메시아를 가리키며, 그를 향하여 나의 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이 메시아는 다윗 왕만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대망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메시아라고 하여도, 자신의 후손으로 올 자를 향하여 내 주라고 말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다윗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성품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대함같이 신실하였으며(삼하9:6-8),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로 행하였으며(삼하8:15), 자기를 저주한 시므이에게도 자비를 베풀었으며(삼하19:23), 분별력과 경건함이 있었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18:14, 삼하6:13-15, 삼하7:18).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보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행13:22)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비정상적인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은 자기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4. 그 첫 번째 이유는 다윗이 아무리 위대한 임금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는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요,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죄에서 구원을 능력이 없는 불쌍한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뿐만이 아니라 다윗 왕에게도 자신의 죄를 사하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인이요 음악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재능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그렇게 목마르게 사모하면서 수많은 찬양을 지었고, 노래하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때가 이르매,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혈통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공기가 없거나 물이 없으면 잠시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공기와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최우선으로 필요한데,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그 분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고, 그 분만이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고, 그 분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가장 잘 어울리도록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바울은 표현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5. 둘째로 이것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 된 상태에서 고백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마16:16절의 베드로의 고백을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고백을 듣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놀랄만한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이지만, 그 고백은 사람에게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고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지혜롭거나 남 다른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에게 귀한 고백을 주신 것이나, 다윗에게 장차 자신의 후손으로 나타날 메시아를 향하여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나의 주라고 고백한 이 고백도 다윗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의 능력과 행함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예배에 임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6. 이스라엘 가운데서 서기관이라면 성경의 최고 권위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인용하신 시110:1절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곧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시 된, 그들이 기다리고 사모하던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 분의 가르침과 행하시는 기적의 능력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이 기다리고 목 말라 사모하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서두에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롬1:3) 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이나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신성모독죄로 정죄하였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시면 누구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해도 그 열정이 오래가지 못하고 종교 생활로 전락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의 비결은 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하는 것이요, 나의 죄와 허물을 늘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7. 본문 37절의 끝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고 했습니다.
무슨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듣는 자들에게 힘과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분명한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아래에 있는 38-40절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갔는지에 대한 확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위선자들이요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불량배와 같은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빙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강요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강탈을 일삼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곳이 마23장입니다.
백성들의 속에는 울분과 얼울함으로 가득 찼지만, 사회적인 약자로서 울분을 참을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 속에서, 예수님이 말씀으로 그들의 거짓과 불신앙을 드러내면서 그렇게 어려운 질문도 지혜로운 말씀으로 받아 해결하시는 모습에 통쾌 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8. 다윗 왕은 본 적도 없는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멀리서 고대하면서도 그를 향하여 나의 주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육신이 아닌 영의 눈을 열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눈앞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대화를 하면서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여긴 것은 그들 스스로가 위선과 탐욕과 거짓에 자신들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오직 “육체를 따라 판단하”(요8:15) 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고백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열정적이고 변함없는 진실한 신앙 생활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고백과 그런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 (엡5:1-2) 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다시 만날 그날까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를 위하여 우리 일생을 온전히 드리는 그런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삶에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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