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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조와 두려움(마가복음13:1-13)
고영수 2020-06-10 추천 0 댓글 0 조회 326
[성경본문] 마가복음13:1-13 개역개정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징조와 두려움(마가복음13:1-13/2020.3.1.오전)


1.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에 대하여 말하기를, 신망애(信望愛),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이고, 망이라고 하면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이고, 애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이것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보물이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으며,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권세나 능력도 이 세상에는 없으며, 신망애가 없는 세상은 살아갈 가치조차도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부터 사순절,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신 것을 묵상하며 4월 12일의 부활절을 향해 나아가는데, 예수님이 33년의 생애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 때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죄도 없는 아들이 원수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 다니실 때에도 하나님은 아들을 위해 하늘 군대를 동원하시거나, 아들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스스로 대적들을 물리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고통 중에 부르짖은 것처럼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런 고난 속에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렇게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난을 통하여 스스로 낮아지셨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 하심으로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2. 고난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죄와 허물을 기억하고 회개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죄도 없이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지막 까지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도 살리시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도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바로 신망애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부활의 영광에 대한 소망,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기 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었습니다.
그 분의 이 사랑과 희생이 오늘 우리를 이곳에 모이도록 만들었고, 그 분의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겸손이 오늘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3. 마가복음 13장을 가리켜 흔히 소계시록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종말이 아니라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도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고 하신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예수님은 그 내용에 대하여 대답하시는 것이지만,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종말에 대한 징조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의 배경을 살펴보면, 한 제자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을 보고 감탄하면서 이런 어마어마한 성전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질문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적으로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장소였고, 다윗이 가나안 사람들의 바알 우상 제단을 부수고 그곳에 번제를 드렸던 곳을, 아들 솔로몬이 기원전 959년에 시작해서 7년 만에 성전을 완공했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솔로몬의 성전은 바벨론 느브갓네살 임금의 침공으로 기원전 586년에 불태움 당하여 무너졌던 것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기원전 515년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재건했지만 너무 규모가 작았습니다.

4. 그래서 이스라엘의 오랜 숙원이었던 성전 재건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헤롯 대왕에 의해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세워졌지만, 이것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원70년에 로마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곳이 하나님의 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전 중심의 역사였습니다.
성전은 그들에게 자존심과 소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성전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2)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때가 언제인지 궁금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로 장차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신 것이 5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읽어보면 종말의 징조를 크게 3가지로 말씀하시면서, 여기에 대한 준비를 부탁하셨습니다.
첫째는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하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쟁과 천재지변의 혼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신앙에 대한 핍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징조의 특징은 사람의 힘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5.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5절에 나오는 미혹이라는 단어는 속이거나 길을 잃게 만드는 것으로, 어떤 정해진 방향이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특별히 진리를 잃고 방황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굳게 서지 못한 사람들이나, 성령님의 인도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 때 다 넘어지고 신앙을 팔아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시119:105) 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확산 중에 있는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다 보니 이런 마음 약한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나 돌아다니는 엉터리 소문이나 정보, 유언비어가 대단합니다.
이 때 제일 먼저 무너지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마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약하고 부족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절에 가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이 단어는 무서움을 느끼거나 불안 해하는 것, 곧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무엇입니까?
SNS를 타고 급속히 확산되는 소문이나 유언비어를 말합니다.
이 SNS 안에는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악한 무리들도 어려울 때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죄 짓게 만드는 무리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과 공갈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고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무지함으로 인해 이런 악인들에게 현혹 당하여 수동적으로 같은 일에 동참하여 공포와 두려움을 더욱 조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순진하기 때문에 악인들에게 이용을 당해 함께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런 혼란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세상을 읽고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바로 잡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소문을 들어도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6. 전염병이 사람들에게 많은 두려움과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이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본문 9절 이하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번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산주의가 노리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지금까지 해 왔던 악행들이 무엇인지 하나 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한민국의 위기와 지상 교회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심각한 위기 속에 빠지고도 여기에 대한 위기감이나 악에 대한 분노심이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그런 감정이나 의지가 거의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나 이웃은 관심도 없고 제 살길 만 찾으면 된다는 그런 생각뿐입니다.
그런데 9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신앙에 대한 핍박입니다.
둘째로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전파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13절에 보니 인내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중국의 우한 출신이냐? 한국의 대구 출신이냐? 일본 북해도에서 왔느냐? 신천지와 상관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이유는 그런 사람들을 자신들 가운데서 몰아내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중국의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가지고 일부 언론에서는 한국폐렴, 일본폐렴, 이런 식으로 보도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신앙의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7.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13절 끝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8절의 민족, 나라에 이어서 9절의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최고 권력자, 12절의 형제와 부모와 자식들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사방이 대적자들 뿐입니다.
집안의 부모 형제 자식들까지 우리를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너 한 사람 때문에 우리 집이 이렇게 어렵게 되었고, 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 형제 부부 관계가 얼마나 살벌한 관계로 바뀌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전도하고 가정을 복음화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복음화가 안 되면 결국 지금까지 사랑하던 관계가 원수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마10:36) 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 전도 안하고 내버려 두면 결국 우리 눈에서 피눈물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제가 고베 개혁파 신학교를 다닐 때, 교장이 하시모토 류조(橋本龍三) 목사님이신데, 이분도 청년 때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절연 당하고 집에서 쫓겨나신 분입니다.
저의 은사이신 강태국 박사님은 목회 하시면서 예수 때문에 집안 식구들과 원수가 되고 집에서 쫓겨나서 오갈 데도 없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씽은 그 부모가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아들을 독약을 먹여 죽이려고 했고, 길에 쓰러진 것을 선교사가 보고 데려다가 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육신적인 것은 양보할 수 있지만 영적인 것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는 믿지 않는 식구들에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다 양보하면서 살고 있으니 과연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8.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미세한 바이러스 하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각오를 가지고 영적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에 보니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 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다는 것을 성령님은 너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순간 순간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없어도 성령님을 의지하면 그 분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많아도 성령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내시고 함께 동행하시면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말세의 징조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혼란에 빠뜨리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여 더 큰 승리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가죽의 무두질은 힘들고 귀찮은 일이지만 그 일을 반복할수록 거센 가죽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명인들과 상인들이 탐을 내는 일등 제품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고 하였습니다.
우한 코르나 바이러스가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지 몰라도 내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유는 비록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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