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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고(고린도후서6:10)
고영수 2020-06-10 추천 0 댓글 0 조회 337
[성경본문] 고린도후서6:10 개역개정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항상 기뻐하고(고린도후서6:10/2018.11.11.오전)


1. 어떤 직장에서 사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그 덕분에 회사의 수익이 올랐고, 그래서 사장님이 사원들에게 풍성한 보너스를 지급했는데, 어떤 사람이 백만 엔을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 기뻤고 감사했습니다. 역시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이 회사를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2백 만 엔, 심지어 어떤 사람은 3백 만 엔 가까이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장님이 알아서 그렇게 지급했겠지만, 이 사람은 그 때부터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어째서 나만 적게 받게 되었을까? 나보다 훨씬 늦게 이 회사에 들어온 저 사람은 나보다 곱절이나 받았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회사의 일이라면 지금까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했는데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생각하니 밤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있었다면, 과연 계속해서 이 회사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처음에 가졌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변함없이 가질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느끼는 감사라는 것은 남과 비교하는 객관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적은 보너스를 받았더라면 이 사람의 감사는 오랫동안 남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 기쁨이 더욱 컷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 다고 했는데,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이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유명한 사람이라서? 내가 소유한 재물이 넉넉하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형통 하기 때문에 기뻐합니까?

2. 저는 말씀을 읽어 내려가다가 본문에는 표기되지 않은 숨은 단어가 하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사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유는 사도 바울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속에는 기쁨이 있었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옥에 갇혀서도 찬양이 흘러나왔으며,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남을 부요 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북회귀선(北回歸線)으로 유명한 소설가 헨리 밀러(Henry Valentine Miller)는 말하기를, 감사의 크기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과연 베스트셀러의 작가 답게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서에 보면 사울 왕이 나오는데 그가 불행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힘없이 무너지고 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을 보면 그에게는 감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리어 감사해야 마땅한 일에도 그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니 이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염려 근심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상 18장에 보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18:7) 이 소리를 듣고 나서는 사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악신이 그에게 들어와 그의 두려움과 근심을 분노와 살의로 바꾸고 말았던 것입니다.

3. 그러나 그의 아들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18:1)였고,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까지 다 내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감사가 넘치고, 사랑하면 모든 것을 내어 주게 되어있고, 감사가 넘치는 나는 빈털터리라도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엡5:20) 하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감사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제 자식이 태어날 때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마는, 다니엘 기도회의 간증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삶이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터 그냥 두면 생명을 잃어버릴 정도의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런 장애 때문에 본인은 물론이고 부모와 주위 사람들에게 평생 고통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내 자식도 남들처럼 건강하게 태어나고 씩씩하게 자라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남다른 은혜라는 것과, 그래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면서 감사가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남들이 불행한 인생이라고 여겨지는 이런 일에 대하여 참된 감사가 나올 때, 이미 이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의 삶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사도 바울이 고후6장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6:1) 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막 4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 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환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받았던 그 기쁨이 근심으로 바뀌고 두려움과 고통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6:4절 이하에서 온갖 환란과 궁핍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주님이 네게 주신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처절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란을 통과하면서도 낙심 하지 않고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받은 바 사명을 벗어버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 중의 괴수를 하나님이 사랑해 주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도 감사한데, 그 위에 내가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긍휼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나를 사도로 삼아 주셨다는 이 사실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 편지를 쓸 때, 이 편지를 받는 그들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교회는 사방으로 분열이 되어 있었고, 신앙은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어린아이들과 같았고, 말이 교인이요 성도이지 실상은 세상 사람들 못지않게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근심 걱정에 짓눌린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5.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가진 자"  라는 것입니다. 과연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언하건대 이렇게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아무것도 없는 자"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에게는 집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노후를 돌보아 줄만한 가족도 없었으며 권력을 가진 인맥도 없었고, 언제 죽음의 선고가 내려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박해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항상 기쁨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남들을 부요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가리켜 "모든 것을 가진 자" 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4:6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건강, 또는 인맥이며 유명세는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 인생에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모든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바울 안에서 날마다 그에게 새로운 힘이 되어 주셨고, 능력과 소망이 되어 주셨고, 연약함 속에서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축복으로 넘쳐흘렀습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고 소유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없어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었고, 항상 기쁨이 넘쳤습니다.

6. 오늘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어도 바울의 표현대로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요 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실 때, 우리도 바울 처럼 많은 사람들을 부요 하게 할 수 있습니다(고후8:9).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을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불평과 염려와 근심,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자를 그 모든 고통에서 건지시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살게 하시고, 영 육 간에 영원토록 부요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믿음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떤 능력으로 나타나는지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기뻐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6: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일 하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 노역처럼 억지로 우리를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날마다 때마다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몸이 불편하고 바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주님 앞에 나와서 기쁨으로 자원하여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본문을 보면,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은 물론이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근심하게 만들고, 고민하고 방황하게 만들고, 많은 유혹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로 넘어지게 만들고, 많은 문제로 골치가 아프고 그래서 사방이 고통으로 쌓여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순간이 제일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감사가 있으면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감사가 있으면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임금을 보면 임금은 나라 전체의 소유주입니다.
백성들의 생명까지 임금의 소유이니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임금이 이 엄청난 권세를 행사하려면 한 가지 절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임금이 가지고 있는 옥새(玉璽)입니다.
만일 임금이 이 옥새라는 도장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임금의 옥새는 국가의 모든 명령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으며, 이 감사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옥새를 가진 자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바로 이 임금의 옥새를 소유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8. 시편 기자도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시50:23)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면,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이 우리도 사도 바울 처럼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으며, 많은 능력과 받은 은사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 해의 마무리를 앞에 두고 만물이 열매를 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의 자녀 된 우리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난한 자처럼 보여도,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우리의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마28:18)를 가져오는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근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날마다 기쁨으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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