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힘(사도행전 8:1-8)
고영수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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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사도행전8:1-8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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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교회의 힘(사도행전 8:1-8/2018.11.18.오전)
1. 인생을 살면서 예외 없이 추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자랑입니다.
물질이나 명예를 자랑하고, 건강이나 미모로 자랑하고, 사회적인 배경이나 지위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도 만족할 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자녀들까지 자랑거리로 만들려고 제 자식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어린 자녀들에게 평생에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는 그런 부모들도 많이 있습니다.
인생이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나고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도리어 원치 않는 고통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 다른 자랑거리가 있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소유하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교사가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면서, 수, 우, 미, 양, 가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수나 우를 받으려고 했고, 양이나 가를 받으면 낙심천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뜻을 알고 보니 양이나 가를 받았다고 낙심 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는 빼어날 秀, 우는 뛰어날 優, 미는 아름다울 美, 양은 어질 良, 가는 옳을 可라는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학교 성적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훌륭한 인격과 장래 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용했던 지혜로운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요즘은 수만 가지의 전문성을 살려서 사회에 진출하기 때문에, 수학을 못한다고 영어 성적이 나쁘다고, 문장 실력이 좀 모자란다고 다른 것 까지 부족하거나 무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사가 어린 학생 각자의 개성과 적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잘 살려 주면, 오히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이상으로 사회적으로 공헌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 교회가 34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연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지에서 교회의 역사가 20년이 넘어가면 전통 있는 교회로 분류가 되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였고,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본질을 우리가 추구할 때 반드시 기억하고 배워야 할 모범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즉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이 승천 하실 때 행1:4-5에 기록된 것처럼, 주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제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 기간은 너무 짧았습니다.
얼마 못되어 예루살렘 교회는 큰 핍박으로 환란에 빠졌고, 그 때 교회가 받은 핍박은, 원어를 보면 짐승을 추격한다, 사냥을 한다, 박해한다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종교 지도자인 사두개파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얼마나 많이 시달렸고, 성도들이 받은 핍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옥에 가두더니 이제는 스데반을 돌로 쳐서 순교에 이르게 만들었고,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목 베어 죽이면서 교회를 향한 핍박은 점점 거세어져 갔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의 기능은 정지되었고,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의 수많은 남녀 상도들이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행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라고 했는데. 여기서 잔멸한다는 말은 모욕을 준다, 더럽히다, 황폐케 하다, 파괴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듯이 그렇게 박해를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3. 그러나 이런 사건은 사도행전에만 나오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에스더에 보면, 바벨론 이후에 일어난 바사국에 하만이라는 사람이 유대인 모르드개에게 악심을 품고, 온 유대인을 전멸시키려 했던 부림절 사건도 같은 종류의 신앙의 박해로 나타나는 전쟁이었습니다.
또한 기원전 175년부터 164년 사이에 일어난 시리아 왕인 안티오커스 4세에 의한 유대인 박해는 처참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모든 종교 의식을 금하고, 부정한 돼지고기를 강요하였고, 그것으로 성전에서 예배 드림으로 성전을 철저하게 더럽혔던 사건입니다.
또한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는 유대인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조직적인 대 학살을 감행하였고, 네로황제의 경우는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기독교도의 책임으로 돌려 기독교인을 대 학살 하는 구실로 삼았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후, 기원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할 때까지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핍박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들이 그것도 반복해서 일어나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이런 환란과 핍박을 통해 주님의 몸 된 지상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구 상에서 그 모습이 사라졌습니까? 신앙인들의 기도 소리가 끊어지고 말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환란과 시련 가운데에서 교회는 그 때 마다 도리어 복음의 역동성으로 더욱 강해졌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원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할 때 유대인들이 너무 끈질기게 악착같이 저항하고 버티자, 화가난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성이 함락될 때 반드시 아이를 밴 여자는 배를 갈라 죽였고, 아이들은 땅에 패대기를 쳐서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예 예루살렘 성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도록 만들었고, 그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피는 강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 때, 1천명이 요단강 쪽의 마사다라고 하는 헤롯 왕의 여름 궁전인 이 요새로 도망가서 그곳에 숨었고, 로마 군대는 유대인을 동원하여 요새의 높이와 똑같은 높이로 흙으로 메워 오기 시작했고, 결국 그곳에 숨은 유대인들은 차마 동족을 공격할 수 없어 전부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학생들이나 군인들이 반드시 이곳에서 그들의 최후 항쟁의 정신을 기리며, 지금의 이스라엘을 이슬람의 세력으로부터 지켜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루살렘의 함락 때에,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그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았을 때에,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향한 박해는 지상 교회의 성도들을 대 환란에서 보호하고 그들의 신앙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고 계획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그러나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짐으로 그들이 숨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환란과 박해라는 고난을 도리어 전도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었습니다(4절).
그 결과 평신도인 빌립 집사 같은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십자가의 복음은 불길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왜 우리는 전도가 안되고, 왜 우리에게는 이런 성령충만한 역사와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오늘날 우리의 삶은 세상일로 인하여 너무 바쁘거나 반대로 너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대단하게 보여도 실상은 영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죽은 자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이 죽었거나 잠을 자고 있으니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에너지나 물질이나 힘은 반드시 강한 쪽으로 흡수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약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도 한마디로 세상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힘이 없고 연약한 교회, 영적으로 죽은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고, 세상 사람들의 성공과 그들의 야욕을 채워주는 희생 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없고, 성령님의 강력하신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신자는,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는커녕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탄식하고 울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변명하고 낙심 하는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평신도 였지만 사도들 못지않은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가는 곳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6. 8절에 보니 예루살렘 교회는 환란 가운데서도 기쁨이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기뻐할 수도 없고, 내 생명을 보존하기도 벅찬 그런 상황에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 기쁨이 충만할 수 있었습니까?
본문 4-5절에 보니, 흩어진 그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유앙겔리온」이라 고는데 이것은 좋은 소식, 즉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육신적으로는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일단 복음만 전하면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 8:2절에,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 신앙의 정체는 반드시 환란이나 핍박이나 시련이라는 용광로에서도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기쁨을 건져낸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박해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이 말은, 집이고 재산이고 직장이나 가족 등의 모든 삶의 터전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핍박이나 환란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는 일제 36년 간의 우상숭배 강요와 핍박으로 수많은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였고 투옥되었던 환란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문을 닫았고, 신사참배의 강요로 교회가 말로는 표현 못할 고난을 겪었습니다.
수원 제암리 교회의 경우는 예배 중인데 일본 헌병들이 둘러싸고, 교회 문에 못을 박고, 기름을 뿌려 불을 질렀습니다.
어린아이를 살리려는 한 어머니는 아이를 들어 창밖으로 던지려 할 때, 헌병이 달려가 총검으로 배를 찔러 죽였고, 교회 안의 모든 교인들이 예배 중에 불 타 죽기도 했습니다.
또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의 신앙의 박해와 그들이 일으킨 전쟁은 대한민국 교회를 초토화시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이런 환란을 통해 도리어 교회의 부흥을 주셨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에게는 점점 축복해 주셨습니다.
7. 오늘날 무지비한 환란과 핍박이 있다면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기쁨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견딜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극심한 환란 가운데서 누가 복음을 위해 수고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은 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믿는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 홍해를 가르도록 만들고, 사막에도 길을 내고, 바위에서 샘이 솟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 가운데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연보가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사실을 롬5:3-4절에,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당하는 환란이란 결코 눈물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이 되며, 박해는 절망과 고통이 아니라 전도의 문을 여는 수단이 되며, 우리의 가난함은 도리어 사람의 마음을 더욱 풍성함으로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상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받은 주님의 은혜와 구원에 모든 성도들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고후 8:2절을 보면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여기 그들의 가난이란 삶의 밑바닥이 완전히 드러날 정도의 가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연약하고 가난한 삶 속에서 그들의 풍성한 헌금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8.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연약함 가운데서도 힘에 넘치도록 드리는 것 자체가 성도의 기쁨이고, 감사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행위가 되고, 고난당하는 형제들을 돕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교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만난 각종 어려움을 전도의 기회로 삼고, 감사드리는 기회로 삼을 때, 교회는 힘을 얻고 부흥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총제적인 위기를 만났지만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능력이 나타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더러운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고 나가며, 중풍 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마술사가 회개하고, 기쁨 없는 성에 큰 기쁨을 가져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는 역사를 통해 복음이 들불 처럼 일어났습니다.
박해로 인하여 사도들 외에는 다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갔지만,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놀랍게 복음이 증거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위기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사라지니 기쁨이 사라졌고, 기쁨이 사라지니 믿음이 능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가난과 질병과 연약함과 많은 문제 중에서도,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린다면, 이 감사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축복을 여는 손길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과 기쁨을 내 삶 한 가운데로 가져오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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