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 설교 자료 >
  • 주일예배 설교
이 일을 생각할 때에(마태복음1:18-20)
고영수 2020-06-10 추천 0 댓글 0 조회 326
[성경본문] 마태복음1:18-20 개역개정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이 일을 생각할 때에(마태복음1:18-20/2018.12.2.오전)


1. 가롯 유다는 노예의 몸값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가 미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돌이킬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배신자의 최후는 너무 참혹했습니다.
자살을 위해서 목을 매었던 끈이 도중에 끊어지면서 그의 몸은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쳐서 배가 터져 온 내장이 다 흘러나온 채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분과 동행하면서 그를 너무 잘 알던 사람 중에서 어떻게 이런 배신자가 나올 수 있었으며, 이 배신자의 말로가 너무 끔찍했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이 가롯 유다에 대하여,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으니라"(마26:24) 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인간이라도 이 세상에 태어날 가치가 있는 사람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 만인 사람과, 태어나지 말아야 할 그런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11월말 쯤이 되면 성탄절을 앞두고 교회는 대강절, 혹은 강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그 분의 오심을 준비하며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강림절을 지내면서 우리의 생각과 삶을 평소보다 더욱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분의 나라와 의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됨이 마땅할 것입니다.

2. 본문의 말씀을 전후로 살펴보면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난 요셉이라는 사람이 마리아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먼저 약혼을 하고 정혼하기 까지 일 년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신부되는 사람인 마리아가 임심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 그 어떤 육체적인 결합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이유를 가리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하였지만, 과연 누가 이런 사실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요셉 자신도 모르는 아이를 마리아가 임신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더구나 그 시대의 상황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던 때였고, 그래서 신 24:1절에 보면, 남편이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그녀에게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의 상황은 당연히 이혼의 이유가 되고도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마리아의 행실에 문제가 있어서 간음의 판결을 받는다면, 신22:21절에 기록된 대로 이 행위는 창기의 행위로 인정되어, 성읍 사람들의 손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요셉에게도 이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요 불명예가 될 것입니다.

3. 그 때 요셉이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19절에 보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 였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쪽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소송까지 갈 것입니다.
사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의 위기입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에 있어서 약혼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약혼과는 조금 다릅니다.
약혼을 하고 1년 동안은 각각 자기 집에서 살아야 하고, 그래서 아직 육체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그의 남편 요셉" 이라 하였고, "네 아내 마리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혼을 하고 파혼을 하게 되면, 결혼한 부부처럼 이혼장을 써 주어야 합니다.
문제는 결혼을 앞두고 기다리는 그 1년 사이에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준수하려는 신앙적 의지와 열정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충성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황당한 사건,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4. 그는 잘못된 불의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비록 마리아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배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마리아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에 대한 배신은 다른 어떤 배신보다 참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믿는 여호와는 사랑의 하나님이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법이나 정의를 외치면서 실상은 그 뒤에서 온갖 추악한 일을 일삼고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곳에 목소리가 큰 사람일수록 이기적이고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남을 정죄 하면서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가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과 낙심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하 11-12장에 보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임신을 시킨 후, 그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우리야 장군을 회유하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를 대적의 손에 넘겨 죽이고도 그것을 범죄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나단 선지자가 남의 이야기처럼 이야기 했을 때, 가장 크게 분노한 사람이 바로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런 반응과 행동은 그 범죄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지라"(삼하12:5) 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야기도 내 이야기처럼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남의 허물과 죄를 통해 내가 회개하고 새롭게 되고, 남의 선행을 통해서는 격려와 힘을 얻어서 나는 그 사람 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시편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생각이 깊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지은 죄에 대하여 깊이 묵상함으로 남들 보다 더 깊은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개하고, 반대로 은혜를 입으면 그 은혜를 오랫동안 묵상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서 체험하고, 그런 체험을 통해 더 큰 축복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를 배신하고 인생의 위기를 만든 마리아를 원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면서 마리아를 보호하려는 계획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이 사건을 놓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20절의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의 말씀입니다.
옛 말에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각에는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생각할수록 사람의 생각은 깊어지고 신중해지고 지혜가 떠오르는 법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얕은 사람은 돌 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얕은 생각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특징이 휴대폰은 종일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후회할 일을 많이 하고 발전도 없으며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짧은 사람은 고생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얕은 사람은 최소한도 말을 아끼고 듣는 것을 많이 하면, 지혜나 지식이 부족해도,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이 그 사람에 대해서 조심하게 됩니다.

6. 그러나 요셉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마리아를 보호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마리아에게 일어난 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20절에,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고 하면서, 21절에 가서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부정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녀를 통해 이 땅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그 죄 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천사의 말이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추측할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요셉이 천사의 말에 의문을 갖지 않고 쉽게 수긍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순종 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 오기를 결심하였는데, 이렇게 된 것도 요셉이 마리아의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길이 막히고 가롯 유다처럼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묵상하면 그 어떤 문제 가운데서도 사는 길이 반드시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깊은 사람과 얕은 사람, 생각이 많은 사람과 생각을 귀찮게 여기는 사람은 인생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7.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는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반드시 깨트려야 만 하는 그런 관계에 까지 이르렀지만, 그러나 주의 사자를 만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니, 이것은 오해로 인하여 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친밀하고 더 사랑하고 이해하는 관계로 발전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결혼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순한 남녀의 육체적인 결합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모든 남녀의 결혼은 예외 없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으로 이 지상에 잉태하는 수많은 새로운 가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과 축복이 넘쳐나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나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면 생명을 걸고라도 지키고자 하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한 훈련과 과정이 필요하듯이, 결혼 생활도 남녀가 함께 수고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 생활이 처음에는 좋아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갈등과 고통이 더 할 것입니다.

8. 그리고 남녀 모두 오늘 본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생각에 대한 단어를 찾아보니 너무 많은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지 못했던 과거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우리를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있는데, 렘 29:11절에 보니,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 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시 40:5절에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크고 위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날마다 시마다 분 초마다 사건마다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홀로 나가서 기도하시고 묵상하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오랫 동안 기도하시는 그 모습은, 아마 요셉의 그러한 성품을 어려서 부터 보고 배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9.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고 변화된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미래도 바꾸시고 축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일 년에 한 번 씩 지나가는 정해진 성탄절이 아니라, 이번에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셉 처럼 깊이 묵상함으로, 더욱 넘치는 은혜와 은총을 누리는 그런 성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태복음 2:1-12) 고영수 2020.06.10 0 339
다음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마태복음 16:15-19) 고영수 2020.06.10 0 348

大阪中央教会 ⧧537-0023 大阪市東成区玉津3-1-33 (06) 6973-5540, 6929-1569 www.chuo.co.kr sirokita@gmail.com

Copyright © 오사카중앙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6
  • Total82,986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