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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중의 평화(누가복음2:11-14)
고영수 2020-06-10 추천 0 댓글 0 조회 325
[성경본문] 누가복음2:11-14 개역개정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사람들 중의 평화(누가복음2:11-14/2018.12.23.오전)


1. 한신 교회를 담임 하셨던 이중표 목사님의 설교에, 렛셀 로우웰이라는 사람이 쓴 「라운풀 공의 꿈」 이라는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라운풀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 사용하셨던 금 잔을 찾기 위해 홀로 말을 타고 떠납니다.
성 문을 나서는 순간 문둥 병자 한 사람이 그 앞길을 가로막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금화 한 푼을 내 던지고 갈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년의 몸으로 떠났던 라운풀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었고, 자신의 뼈라도 고국에 묻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돌아오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엄동설한 겨울에 말도 없이 남루 한 차림에 지팡이를 겨우 의지하여 마침내 성 문 가까이 도착하니 이곳을 떠날 때처럼 또 다시 한 문둥병자가 손을 내밀며 적선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라운풀은 그 문둥병자를 보고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리며 남은 빵을 반으로 나누어 주면서, "형제여, 내가 가진 것은 이것 뿐이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받으라" 고 주면서, 물가로 내려가서 차고 있던 그릇으로 물을 떠다가 문둥병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문둥병자는 홀연히 빛나는 옷을 입은 예수님으로 변하면서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기를, "내니 두려워말라. 보라 거룩한 금 잔을 찾으려고 평생에 뭇 나라를 헤매면 무엇하겠느냐. 네가 찾던 금 잔은 물을 떠온 이 그릇이요, 찢어 나누어준 이 빵은 나의 찢긴 몸이요, 네가 나를 위해 떠 온 이 물은 내가 흘린 피니라" 고 하면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나누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성탄절을 지나면 2018년도는 한 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면서, 불충하고 부끄러운 것은 용서를 구하고, 부족한 것은 도움을 구하고, 연약한 것은 주님을 의지함으로 소망 찬 새해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해를 돌아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관계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힘을 얻고 도움도 받으며 서로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그럴듯한 사업을 하고 가게를 열어도 사람과의 만남이 없이는 장사를 할 수 없으며, 내게 무한대의 지식이 있어도 만남이 없이는 그것을 한 사람도 나눌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금 잔을 찾기 위해서 평생을 헤맸던 이 라운풀 공도, 한 문둥 병자와의 만남이 없이는 아마 예수님과의 만남도 없었을 것이고, 그는 가장 불쌍한 인생 중의 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해 동안, 이런 만남을 통해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었으며,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으며, 또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습니까?
사실 인간관계라는 것은 사람을 굉장히 피곤하게 만들고 좋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까?

3.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모든 사람이 주목할 중요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천사가 온 백성에게 임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강탄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은 본문에서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다주는데, 첫째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이요, 둘째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중대한 사명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이 땅에는 평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평화를 약속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평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평화의 왕이 되신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평화는 우리가 예배를 통해 그 분을 만날 때 시작되는 것이고, 그 분을 내 안에 모실 때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는 이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고, 33년 동안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다가 이 평화를 완성하시기 위해 마침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본 받아 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평화는 인간관계에서 출발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이루는 인간관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가야 합니까?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모범을 보일 때 내 주위에서 부터 화평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용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18:21-22절에 보면, 베드로는 좀 교만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7번쯤 용서하면 어마어마한 자비와 관용과 존경을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말에 전연 놀라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단순한 계산으로 490번의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의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참 용서가 무엇인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베드로가 말한 대로 일곱 번도 용서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5. 최근에는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을 조심해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고전 6장에 보면, 성도는 세상도 천사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 법정에서 서서 성도들끼리의 분쟁을 그들에게서 판단 받는 것이 옳지 않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6:7) 고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물러 있다면, 무엇보다도 지금 예수님이 내게 원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대부분의 성도 간의 분쟁은 교회 안에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쟁이 아니라 이 땅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평화를 위해 서로 용서하고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이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텐리 목사님은 용서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번 성탄절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 용서라는 최고의 선물을 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6.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헌신하고 인내를 하여도 용서가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평화의 왕이 우리 가운데 오시지 않고는 진정한 평화와 용서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우리입니까?
세상에서 최고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최고 가는 돈을 들고 장으로 백화점으로 자꾸 바깥으로 돌아다닙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돈은 수단이고 물건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린 바 된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찾고 구원하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고 쌓아 놓아도, 내 몸이 병들과 자식이 유괴 당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을 위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 다 지불 해서라도 회복하고 되찾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들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유괴 당하고 실종되어진 우리를 찾기 위해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성탄절입니다.

7.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은 아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는 우리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고 동거하는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위장된 평화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참된 안식과 평안과 화평은 내 안에 예수님이 오실 때 가능한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내 안에 임마누엘 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왜 인간의 힘으로 평화를 이룰 수 없느냐고 합니다.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를 분쟁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게 만들고, 죄가 우리 에게 있는 온갖 좋은 것을 다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분쟁과 자랑은 있어도 기쁨과 평안은 없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고단함과 근심과 두려움은 있어도 평안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는 육신을 입고 낮아짐으로 섬기는 삶을 사셨고, 그러한 겸손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8. 사람들 중의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왕으로 오실 때,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도 용서할 수 있으며, 하나가 될 수 없었던 사람도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먼저 용서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하고 먼저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풍요로운 21세기, 소원을 성취하며 자유를 맘껏 누린다고 하여도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없는 풍요와 자유는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고 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 그는 분명 우리를 위해 오셨고, 그 분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원한 평화, 곧 사람들 중의 평화를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해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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