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나심(마태복음1:20-23)
고영수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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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마태복음1:20-2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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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마태복음1:20-23/2019.12.15.오전)
1. 최근에 구입한 책 중에 하나가 이영훈 교수 외에 6명이 쓴 「반일 종족주의」 라는 책이 있는데, 핵심이 한일 합방 이후에 일어난 한일관계에 대한 잘못된 사실이나 역사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 사실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데, 일본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저로서는 그 책에 기록된 내용을 전부 용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맹목적인 반일주의에 대한 잘못된 사고의 틀을 깨트리고 한일 관계를 바로 잡는데 있어서는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선교사님들에게도 일 독을 추천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된 책도 지금 시중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에는 한국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충격적인 사실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한국은 거짓말 문화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보험사기는 자동차에서 시작해서, 생명보험, 손해보험, 의료보험 등으로 2014년도에는 연간 그 규모가 4조 5천억이 넘었고, 민간에 대한 정부의 각종 보조금이나 지원금도 사기에 의해 국민들이 낸 세금이 여기저기서 줄줄이 새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8년도 국 정감사 때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지적재산권에 대한 정부 지원금의 33%가 사기꾼들이 손에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일본과 비교해서 위증죄(법정이나 국회에서 거짓으로 진술하는)는 172 배나 많으며(2014년), 허위 사실을 가지고 고소하거나 무고한 건수는 50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또한 세계 70여 개국이 참여하는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 한국인에게 일반적으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신뢰한다는 답이 1985년에는 38%였는데, 2010년에는 26%로 감소하였고, 서로가 믿지 못해서 일어나는 소송 건수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제일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이 정치 세계라고 합니다.
2. 우리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 2002년도의 대통령 선거 때에 김대업이란 자가 나타나서 이회창 씨의 아들이 군대 가지 않으려고 체중을 줄였다고 했는데, 결국에는 거짓말로 드러났지만 이로 인해 대통령 선거의 판세는 뒤집어 졌고, 2008년 광우병 파동이나, 박근혜 대통령도 거짓말에 무너졌고, 지금도 거짓말 때문에 옥살이 하는 것이 대한민국 실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세월호 사건의 전모도 다 밝혀졌는데 광화문에는 여전히 세월호 천막을 치고 왜 그 때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떼를 쓰도 아무도 그것을 항의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것도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은 세월 호처럼 반드시 침몰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학교 다니는 10대 아이들도 옛날의 자식들이 아닙니다.
중학교 3학년의 사회 교과서를 보면, 인권 침해 사례를 발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부모님이 나의 메일을 몰래 본다, 집안 설거지는 여자인 나만 시킨다, 그러면 인권위원회에 부모를 고발할 수 있으며, 지역 신문에 이런 의견을 실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제는 자식들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부모를 당당하게 고발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은 적어도 가정 교육이나 신앙 교육은 국민의 권리이고 가정의 고유권한인데 이제는 이런 것도 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말씀으로 교육하지 않으면 인격도 신앙도 다 무너지고, 무너진 아이들의 인격과 삶이 사회 전체를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가 대한민국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소망을 둘 곳은 말씀이 살아있고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교회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중대한 관심을 끌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를 보면 영수가 나오고 철수가 나오고 영희가 나왔습니다.
성은 나오지 않지만 부모님이 지어 주신 제 이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요셉과 마리아가 왜 태어날 아이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 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그 분이 구원하신다" 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이지만 구약 시대에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는 그 이름이 단순화되어서 「예수아」 로 불렸고, 나중에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 성경에는 「예수스」 로 표기했으며, 그것이 결국 예수라는 이름으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그 이름이 얼마나 흔했던지 최근에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그 당시의 재판 기록에 보면, 어느 여인의 상속 문제를 다룬 서류에 남편의 이름도 예수, 시아버지 이름도 예수, 아들 이름도 예수였습니다.
북한에서 김정은이가 정권을 잡으면서, 북한에 있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강제로 개명을 하도록 함으로 적어도 이름을 통해서 자신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임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예수님 당시에는 여기도 예수, 저기도 예수라는 이름이 넘쳐났습니다.
그야말로 영수나 철수 같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시는데 좀 특별한 이름을 지었으면 좋을 텐데, 가장 흔한 이름을 지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21절에 보면 마리아나 요셉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천사로부터 받은 이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아이의 이름까지 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본래 죄로 말미암아 창조 주 하나님을 떠난 존재였습니다.
창조 주를 스스로 버렸으니 주인을 잃은 존재요, 그래서 마귀의 종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한 번 마귀의 종이 되면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 중에 거짓말과 교만을 포함한 탐욕과 미움입니다.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점점 죄의 더 깊은 수렁으로 완전히 멸망할 때 까지 깨닫지 못하고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잃은 자를 찾기 위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의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서 아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너무 흔해서 세밀하게 주목하지 않으면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출생지를 촌구석 베들레헴으로, 그것도 말 구유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이름도 가장 흔한 이름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의 권세자들은 자신들이 백성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과시함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가지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누구나 가까이하고 평범하게 만날 수 있도록, 사회의 밑바닥 인생일수록 가까이 만나고 위로 받고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과 부귀를 최고로 여기지만, 우리가 가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지고 아름답고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요 세상을 이기는 능력인 줄 믿습니다.
5. 둘째는 임마누엘의 역사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연약한 인생의 입장에서는 전능하신 창조 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는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롬5:8에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온갖 지식과 이성을 동원하고 경험을 살린다고 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보좌 위에 계신 아들을 죄 많은 세상 한 가운데 보내주신 것도 감사한데, 나중에는 그 아들을 우리의 죗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을 당하도록 하셨으니,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가 이런 일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행하셨고,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 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 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 가리라.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나를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6. 문제는 아들이 우리에게 오셨는데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가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임마누엘이라는 말 자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원래부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수끼리 동거하고 24시간 쉬지 않고 함께 있다고 하면 이것은 서로가 피곤하고 고통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이 일을 하나님은 행하셨습니다.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인간적은 방식으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20절에 기록된 것처럼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 분의 창조 능력으로 마리아 몸에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이것이 마태복음 1장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조건이 전연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 스스로 행하신 일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나 마리아는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 일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고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길 때,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되고, 무능한 인생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축복의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순종 할 때 기적과 능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7.요 14:10절에 보면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하나님은 이미 서로 안에 계시면서 하나가 되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 하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보니 임마누엘의 역사를 깨닫지 못했던 요셉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눅1:30절에 보니 이 두려움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1:37에서 "대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38) 고 고백하였습니다.
거짓으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힘 있는 자가 거짓말하고 떼를 쓰면 그것이 곧 법이고 정의가 되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세상 향락만 주어지면 그것이 인생 성공이고 축복인 줄 착각합니다.
그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기다릴 뿐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모든 죄와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시기 위함이고,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면서 우리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날마다 새롭게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하여 내 인생에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과 은혜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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