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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각오(一死覺悟)(마가복음14:27-42)
고영수 2020-06-20 추천 5 댓글 0 조회 389
[성경본문] 마가복음14:27-42 개역개정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일사각오(一死覺悟)(마가복음14:27-42/2020.6.21.오전)

 

1.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제부터 아메리카가 중심이 되어 세계를 재건하자고 외쳤지만, 미국 시민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윌슨 대통령이 많은 공을 들여서 세운 국제연맹에는 미국이 가입하지 않는 이상 현상이 일어났고, 윌슨 대통령은 그런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 전국에 유세에 나섰지만, 결국 그는 도중에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은 자국 경제의 번영으로 급격하게 사람들의 삶은 쾌락 중심으로 변해갔고, 폭력과 매춘, 도박 등이 번성했고 그래서 금주법이 만들어 졌지만, 여전히 폭력단들이 활개를 치며, 정계에는 오직(汚職) 사건이 다반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감정에만 의존하다가 마침내 19291024일의 암흑의 목요일, 즉 금융가의 주가가 대폭락하면서 전 세계에 경제적 대공황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지금 전 세계는 다시 우한코로나 바이러스로 전대미문의 고통과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전염병이라는 외부적인 환경으로 인한 것 보다는,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성을 잃고 그야말로 물질중심, 쾌락중심의 감성에 의존해서 행동하는 모습이 백 년 전의 사람들과 너무 닮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진리와 정의의 외침에는 귀를 막고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고 하는 이런 현상이 또 다시 이 지구촌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만 해도 법치는 무너지고 도덕은 땅 바닥에 짓밟히고 그야말로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카오스(혼돈)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무감각하며, 오늘이 무사하니 내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 시켰" 다고 하셨고,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 시켰"(17:27-29)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선한 일을 보면 칭찬하고 격려하고, 불의를 목격하면 의분을 일으키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 비뚤어진 것은 함께 힘을 모아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들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변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바로 잡을 수 없으며, 오늘 내가 결심하지 않으면 내 주위는 변하지 않으며, 결국 우리는 백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혼란과 참담함과 고통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서두에 보면,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나를 배신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족한 것도 많고 문제도 많았습니다.

적이도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으면, 뭔가 스승 되신 예수님을 닮은 데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 가다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저것들을 다 태워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9:54, 22:24).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함께 기도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제 자신이 아무리 못났고 문제가 많아도, 다른 사람들이 내 잘못과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것도 공개적으로 말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신뢰하고 존경하는 분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속상하고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봐, 이렇게 생각합니다.

 

3.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베드로가 반박합니다. 예수님이 "다 나를 버리리라" 는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러하지 않겠나이다" 는 것입니다.

특히 나는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과시한 것입니다.

일의 결말을 보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베드로는 이 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때 만큼은 베드로는 진실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진실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더 심한 말씀으로 베드로의 변명을 구체적인 증거를 나열하면서 공격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0절에 보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혹을 떼려다가 엉뚱한 혹을 더 붙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자신의 배신을 말씀하시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중에 참으로 기분이 나쁜 표현은, 닭은 두 번 울었는데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이것입니다.

정말 3년 동안 동거 동락하던 제자와 스승의 관계가 의심이 될 만한 그런 상황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할 만한 그런 상황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럴 때 이렇게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려고 합니까?

내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하니 더 강력하고 긍정적인 확신을 상대방에게 심어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을 보면,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얼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고 고백했습니다. 그야말로 일사각오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고백이 다른 제자들의 마음에도 들었는지, 그들도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로 예수님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고백했습니다.

 

4. 세상에서 거짓말을 제일 잘하는 동물이 있다면 그것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입니다.

거짓말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과 판단을 흔들리게 만드는 애매모호(曖昧模糊)한 말로 상대방을 유혹하거나 자신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의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고백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런 상황을 만난다면 누구나 예외 없이 상대방의 신뢰감을 얻기 위해서 일사각오의 고백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의 고백은 거짓 아닌 진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결심을 하고 확신을 해도, 일단 주어진 상황이 달라지면, 인간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결혼할 때에는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 까지 떠나지 않고 하나 됨을 지키겠다고 해 놓고도, 살다보면 그 언약을 깨트리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친구의 우정도, 사업에 관한 협력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상황이 달라지고 환경이 변하면 누가나 마음이나 생각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진심으로 고백했지만, 결과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제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며, 그래서 죄성에 지배당하기 쉬우며, 환경이나 분위기에 약한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약함과 죄성을 핑계 삼거나 환경을 핑계 삼는다고 우리의 허물이나 배신 같은 죄가 용서받을 수는 없습니다.

 

5. 에스더는 바사왕국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로, 그녀의 삼촌인 궁전의 문지기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만에 의한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계략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온 유대인에게 금식기도를 요청한 후에, 임금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도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성경은 기록하기를,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4:16) 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그녀가 이런 각오를 가지는 이유는, 그 나라는 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왕후라도 임금이 부르지 않을 때 찾아가면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에스더도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금식기도를 요청하고 본인도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림으로 자신의 민족을 죽음에서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니은 지금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재벌이나 정치가나 유력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통해 일을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평양 산정현 교회의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도 일사각오의 신앙이었습니다.

일본이 1925,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어놓고 내선일체를 핑계 삼아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조선교회와 성도들은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탄압으로 말미암아 1936년에 제일 먼저 천주교가 무너지고, 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주기철 목사님은 감옥에 가두어 놓고, 1938년에는 일본의 회유에 굴복한 일부 목사들을 앞세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허락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주기철 목사님의 목사직을 파면시키고, 교회에서 내어 쫓고, 가족들을 사택에서 쫓아내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나는 비겁하게 살기 위해서 우상 앞에 절할 수는 없다면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냐,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고, 1944421, 47살에 감옥에서 순교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6.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훌륭한데,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일사각오의 신앙을 고백하고도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우리 같은 연약한 인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입으로 고백한 중대한 결심을 연약한 인간이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할 정도로 그들은 철저하게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32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그것은 그들이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왕후 에스더도 주기철 목사님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기도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33-34절에 보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고 부탁하실 정도로,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도 연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계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일사각오의 신앙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잠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거듭 찾아가셔서 기도하기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는 연약해도 기도하면 성령님이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과 육신이 연약해도 기도는 우리가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7.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아무리 결심하고 목숨을 내어놓는 일사각오의 신앙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살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것은, 당신의 제자들이 큰 소리만 칠 줄 알고 자랑만 할 줄 알지, 얼마나 연약하고 쉽게 배신하는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8절에 보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내 자신을 실망시키면 더 이상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아시면서도 그런 제자들을 다시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기대를 걸고 계셨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그런 기대 때문인지 그런 제자들에게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강림하셨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서 그들은 전혀 새사람으로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은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일사각오가 거짓의 각오가 아니라 나의 참 고백이고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기도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는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이라도 새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비겁한 사람도, 비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습관적으로 실패하는 사람도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능력으로 축복으로 새롭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8. 우리 인생이 살다보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어떤 문제 앞에서도 나 홀로 서야 합니다.

지금은 부모 밑에서 그 사랑에 의존하여 살지만, 부모를 떠나서 혼자 일어서면 그 때부터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은혜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지만, 영적 싸움의 현장에서는 누구나 혼자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싸움은 고독한 싸움이고 은밀한 전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겠다고 했지만, 목숨을 걸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과 남다른 욕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믿음보다 내 생명과 내 가정과 내 생명이 더 귀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함께 모여 기도하기 시작하니 성령님이 그들 가운데 오셨고, 모인 자들이 다 성령 충만을 입으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 많아도 세상과 마귀는 기도하는 성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성도의 일사각오는 헛맹세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그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이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능력 주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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