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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로마서1:1-7)
고영수 2021-09-25 추천 0 댓글 0 조회 1031
[성경본문] 로마서1:1-7 개역개정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나는 누구인가(로마서1:1-7/2021.9.26.오전)

 

1. 작년 920일부터 강해하던 신명기는 전반부를 마쳤으니 잠시 쉬고, 오늘부터 신약으로 와서 로마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상황을 봐가면서 로마서를 전체 끝내고 다시 신명기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로마서도 반만 강해한 후에 신명기를 다 마치고 로마서 후반부로 돌아오던지, 상황을 보면서 결정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늘부터 강해하려는 이 로마서를 가리켜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구약 66권이 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니 어느 것에 대한 우열을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든 시대의 신학자들과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가치를 특별하게 평가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포의 어거그스틴은 젊어서부터 대학교수며 철학자로 이름을 낼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잘못된 자신의 삶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많은 고민을 했지만, 스스로 그 쾌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을 붙들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그 날도 정원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어린 아이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톨레 레게". , 책을 들고 읽어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즉시 방으로 달려가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로마서 13장이었고, 그곳에서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는 말씀이었습니다.

 

2. 그는 그동안에 이 말씀처럼 형편없는 삶을 살았던 것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과 답답함에 어쩔 줄 몰라할 때, 갑자기 가슴속에 한 줄기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고, 그는 즉시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섰을 때는, 초대교회 이후로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그 오랜 세월을 통털어 기독교에 가장 크고 위대한 영향력을 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던 그 때는, 기독교가 가장 큰 어려움이 빠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것은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잘못된 이단 사상을 들고 들어와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 잘못된 가르침이 삽시간에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지 않았더라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는 사실에 지금까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켜 낼 수 있었습니다.

 

3.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에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래 전부터 로마를 방문하고자 했지만, 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로마교회를 향한 편지를 보내면서 자기를 소개할 때, 보통 사람들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그런 인사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당시 종이라는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격이나 개인의 주장이나 삶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 집에 있는 가구나 짐승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절대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누구누구와의 관계를 말할 때,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내가 도와줘서 된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결국 그 사람의 말 대로라면 대통령은 허수아비고, 내 힘이 없었으면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교회에 대하여서도 그렇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서두에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체성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라고 하는 이 존재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말이 오늘 제목처럼 나는 누구인가? 이것입니다.

 

4. 사람의 가치는 태어나보니 이렇게 저렇게 주어진 권한이나 능력이나 소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5:10) 이라 하였으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이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인생의 목표가 되고 삶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19살쯤에 이 세상의 온갖 고민과 문제를 홀로 진 것처럼 그렇게 괴로워하며 살았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며, 왜 살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며 왜 이곳에서 함부로 숨을 쉬고 있어야 하는지, 온갖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며 그 황금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고,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아무도 내 고민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의 책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는데, 그 복잡하고 어렵게 쓰인 책들이 웬일인지 간결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때 만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덴마크 출신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엘케골이었습니다.

그가 쓴, 이것이냐 저것이냐, 죽음에 이르는 병 같은 글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읽어도 전도서나 아가서 같은 곳만 찾아 읽었습니다.

지금도 1970년대 초의 제 일기를 읽어보면, 제가 그 당시에 얼마나 캄캄하고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5. 여기서 철학자며 신학자인 키엘케골에 대해 잠시 말씀을 드리면, 그는 생각하기를, 인생이란 불안한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인간이 느끼는 절망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사람이 육체에 질병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정신세계에도 정신병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에게나 정신적인 아픔이 있는데,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병인 이 절망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스스로 그것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절망 가운데 남아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망에 대한 인간의 고집과 의지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는 절망 자체는 죄가 될 수 없지만, 그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면서, 이 절망의 심연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인 이 절망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용기와 소망을 주셨기 때문에, 절망은 결코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키엘케골의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절망의 심연에 빠져서 그것 자체를 인생의 의미처럼 즐기며 살던 죄인이었습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죽음에 이르는 병인 이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이 홀로 하나님 앞에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키엘케골의 말대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서면서 절망의 심연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었고 복음의 사명자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6.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에 자신을 소개할 때, 위대한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이것은, 사도바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1절에 기록된대로,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선택받은 존재요,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 사는 그것이 사도바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택정함을 입었" 다는 이 말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이같은 확고한 정체성으로 인해, 그 어떤 환란과 핍박을 만나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의험과 광야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고후11:23-27)지만, 결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따라 우리가 죄 사함을 얻었고,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생명의 빛으로, 저주와 고통에서 은혜와 평안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 이 놀라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이 사명감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순교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증거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7. 오래 전, 미국인이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시골의 골동품 가게에서 목걸이 하나를 싸게 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세관에서 세금을 많이 물어야 했습니다. 싸구려 목걸이에 왜 이렇게 세금을 많이 물리는가 하고 물었더니, 이 물건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 보석상에 가서 감정을 한 결과, 그 사람이 놀라며 목걸이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 보라고 하는데, 보니 그곳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죠세핀에게, 보나팔트 나폴레옹.

이런 싸인을 보지 못했을 때는 그 물건이 싸구려인 줄 알았는데, 나폴레옹의 싸인을 보니 보물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싸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며,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이 흐르고 있으며, 지금 내 안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싸구려의 인생을 살 수 없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함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음으로 인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의 세월을 보냈지만, 결코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바울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 함께 거하고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순교를 통해서 내어놓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 십자가의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사실이 본문 6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 라는 것입니다.

 

8. 지금까지 우리는 나와 내 자녀를 위해서, 내 가정과 사업을 위해서,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고, 그들을 최우선 하며 살아왔다면, 우리의 삶은 정체성을 잃은 잘못된 삶을 산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된 자는 오직 주인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명령에 절대 복종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홀로 택함받은 존재가 아니라,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관계를 뛰어넘어 또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고전1:21)고 하였고,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왔으며, 지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제가 오늘 제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있다면, 그것은 나도 사도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증인으로 부름받은 자라는 사실, 이 한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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