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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원하십니까?(로마서1:8-15)
고영수 2021-10-02 추천 0 댓글 0 조회 731
[성경본문] 로마서1:8-15 개역개정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무엇을 원하십니까?(로마서1:8-15/2021.10.3.오전)

 

1.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다이아몬드라고 다 똑같은 가치와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4C 라고 합니다.

선명도(Clarity)와, 색상(Color)과, 중량(Carat), 그리고 컷팅(Cut)입니다.

첫째는 선명도입니다. 다이아몬드 안에 불순물이 없어야 하고, 흠이 없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맑고 투명한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둘째는 색깔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자체에서 노란색이 나온다고 하는데, 노란색이 강할수록 가치가 떨어지고, 맑아서 색상이 없을수록 가치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셋째는 무게입니다. 당연히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가치가 올라갑니다.

넷째는 모양과 결이다. 다이아몬드는 깎아내는 각도와 그 모양에 따라 뿜어내는 광채가 많아지고 또한 모양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 속에 어떤 소망이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지고, 생명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15:39-41절에서, 육체라고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다 같은 육체지만 하늘에 속한 형체가 따로 있고, 땅에 속한 형체가 따로 있으므로, 그들이 받을 영광 또한 각각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속담에 모로 가도(옆으로 걸어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 천국도 일단 들어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 내어드리는 순교자의 삶을 살았는데,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살다가 겨우겨우 불 가운데서 건짐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받을 영광과 어찌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2.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또는 복음의 사명을 받은 전도자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평가가 달라지고 받을 상급이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는지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로마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말하기를, 여행할 때, 절대로 로마를 먼저 방문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를 먼저 보게 되면, 다른 곳은 시시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로마는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경탄을 일으킬 만할 정도로 대단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도 여행의 목적으로 로마를 방문하려고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로마에 가고 싶어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로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줌으로, 그들이 믿음에 굳게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여간해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할 수 있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이나 약점은 감추고 특별한 것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나는 죄인이고 나는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생이므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양과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3.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고전15:43) 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나 혼자 강한 자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본문의 사도바울처럼 주님께 받은 신령한 은사를 서로 나누고 공급해 주면서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면서 함께 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음의 공동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는 서로 나눌 때 함께 견고해지며, 그것이 서로간에 위로와 소망이 되고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이해와 위로가 필요하고, 때때로 이런 것을 통해서 새 힘을 얻지 못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2절에 기록된대로 로마를 방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한" 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서로 함께 가야 하며, 또한 우리는 홀로 선 것이 아니라 영원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믿습니다.

 

4.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일을 위해서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 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경험하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늘 기도하지만 그런데도 우리의 현실은 자꾸 길이 막히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선한 일을 위해, 주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해도 원하는 일이 자꾸 방해를 받고 그 길이 막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하고, 내가 이렇게 선한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외면하실까?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낙심하고 불평하거나 심하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롬8:28) 다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간절한 마음으로 로마를 방문하기를 원했는데도 번번이 그 길이 막혀서 갈 수 없었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어도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가 선택한 새로운 방법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대하고 있는 이 로마서를 기록하여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만일에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했을 때, 그 길이 막히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로마서를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저 유명한 히포의 어거스틴의 변화도 없었을 것이고, 시대마다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열어가는 개혁자들의 외침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로마서가 없었더라면 중세의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역사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이 로마서는 기독교 역사에서 큰 힘과 변화와 능력을 가져다주며, 지상의 교회를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지킨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해보면,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이 번번이 막혀서 갈 수 없었고, 그래서 이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것은 도리어 잘된 일이요, 분명 오늘 우리에게도 큰 축복이요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불평하고 낙심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 어떤 잘못된 인생이라도 그 어떤 사건이라도 넉넉히 고치고 회복하시고 놀라운 변화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더 유익하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5. 계속해서 본문 14절을 보면, 복음에 대한 바울의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는 이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스스로 빚진 자라는 말은, 그가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사방에 빚을 지면서 살았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물질에 빚진 자가 아니라 복음에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신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어떤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까?

고전15:9에,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 다고 했고, 갈1:13절에도,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였다고 하였고, 빌3:6절에도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 였다고 했으니, 그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하면서도, 도리어 하는 일은 늘 하나님을 원수로 만드는 일만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복음의 사도로 생명을 걸고 이 복음을 전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는 십자가의 복음과는 원수된 삶을 살았던 그런 과거 때문에, 복음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온 이방인에게 복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빚진 마음을 가진 이것이 도리어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넘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남들보다 잘난 것이 있고 공로가 있어서 주님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구원으로 불러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같은 죄인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라고 먼저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빚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함으로 갚아야 하고, 나같은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셨고, 어떻게 축복하셨는지 세상에 나타냄으로 그 빚을 갚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줄 믿습니다.    

 

6. 문제는 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세상의 장애물이 너무 많은데, 그 가운데서 최대의 장애물은 막힌 길이 아니요, 복음을 방해하는 어려운 환경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한 사람의 구원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기주의적인 이 믿음이 복음의 장애물입니다. 가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 두려움이 복음의 장애물입니다.

복음을 모르고 예수님도 만나지 못해서 고통과 저주와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막는 내 자신이 바로 복음의 장애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열매 맺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싫어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하는 내가 바로 복음의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일어선다면, 비록 길이 막힌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시고, 이전보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심을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죤 웨슬레는 모라비안 형제단으로 부터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레는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고 그런 상태로 어떤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종교개혁가 루터가 쓴 로마서의 서문과 서론을 읽는 것을 듣게 되었고, 그는 즉시로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치고 말았습니다. "나같은 사람의 죄도" 용서를 받았다니!

그것이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전연 새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이 웨슬러 같은 사람도 믿어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어 적지 않은 시간을 방황하면서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7. 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바울처럼 모든 이방인에게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이 땅의 사신 우상들이 다 무너지고, 그 무너진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나 한 사람의 구원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우리 가족과 친족은 물론이고, 이 땅 이 민족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이런 소원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처럼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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