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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자(로마서1:26-32)
고영수 2021-10-23 추천 0 댓글 0 조회 739
[성경본문] 로마서1:26-32 개역개정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버림받은 자(로마서1:26-32/2021.10.24.오전)

 

1. 인간의 삶은 그 존재 자체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물론 욕망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욕망은 인간으로서 더 크고 가치 있는 비전을 가지게 만들고, 어떤 욕망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도 이런 우리의 욕망을 통해서 이 시간에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에 더 충만하도록,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영적인 훈련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게 합니다.

그러나 육신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또 다른 욕망은 스스로 제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지저분하고 난폭하고 심각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마침내는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수많은 욕심을 스스로 제어할 만한 아무런 능력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고 빠른 자동차라도 속도를 조절하거나 비상시에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고,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잘못된 육체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달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육체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양심은 물론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거나 법을 파괴하는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첫 번째로 나오는 욕망의 산물이 동성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2.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헬레니즘 문명사회에서 동성애는 보편적인 사회적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이 여기에 빠졌고, 이것은 로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의 여자들은 이혼하기 위해서 결혼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이혼을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의 성도덕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클라우디오 황제의 부인은 남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밤마다 궁을 빠져나가서 매음굴에서 손님을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떠난 첫째 증거는 성적인 타락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욕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 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욕심은 원어로 보면, 욕정을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 다스릴 수 없는 강력한 성적인 애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표현한다면 성도착, 변태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표현하기조차도 부끄러운 이런 일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26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 다고 하였고, 28절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 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유기(遺棄) 라고 하는데, 유기의 반대말은 택함입니다.

여기에 대한 내용은 로마서 9장에서 더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21세기에도 만연하고 있는 이 동성애,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순리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를 말하고, 그 반대인 역리는 창조질서를 거역하고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이런 행위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하여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내용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19장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 찾아온 천사를, 밤중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들을 내놓으라고 말할 때, 5절에서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는 이 말은 동성간의 성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성적인 타락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3. 계속해서 본문은 하나님께 버림당한 자들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데, 28절에 보니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평가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을 조사하고 저울질하고 평가를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롬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이고 특권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온갖 죄악을 육체가 원하는 대로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자들에게 확실하게 경고하기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73:27) 다고 하였고,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줄 믿습니다.

 

4.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깜깜하고 얼마나 지혜가 없으며, 그래서 그들의 교만과 영적인 어두움이 온 세상을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의 악행으로 그 머리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서로 연대하여 힘을 길러 세상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32절에 보니, "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고 하며 그것을 장려하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30년의 세월에 걸쳐 컴퓨터를 움직이는 윈도우 프로그램이나, 닌텐도의 새로운 게임기며, 새로운 아이폰이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신제품을 내놓는 가게 앞에 이삼일 전부터 밤을 지새우고 비바람을 맞아가면서 줄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가 지혜로운 것처럼 자랑하고 인터뷰합니다.

유명한 배우나 가수를 만나기 위해서 하루 전에 지방에서 비행기를 타고 공항으로 몰려옵니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문화적인 움직임으로 봐야 합니까? 아닙니다.

죄가 그들을 어리석게 만들었고, 자신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살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질서가 있습니다.

이러한 질서를 역행하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탐욕과 성적인 타락과 비윤리적인 모든 행위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참 진리를 배척해 버리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어리석음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자랑스럽게 행하고 있으며, 그래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정욕의 노예로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5. 본문 32절을 보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버렸고, 그들 스스로가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애를 태우시면서 그들을 은혜로 붙들어 두기를 원치 않으셨고, 차라리 제 마음대로 살도록 죄 가운데 내버리셨고, 그래서 육체로는 더러운 죄에 빠지고, 영적으로는 지각을 잃고, 선악에 대한 판단을 잃어버린 채,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노예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행하는 악행을 자랑하고 널리 퍼뜨리고, 악행하는 자를 격려하고 눈감아 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미 죄로 말미암아 어리석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영적인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물질에 대한 주권과 더불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선한 청지기처럼 칭찬받고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었습니까?

사도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지혜가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 보고, 그를 환영하였을 것이나, 죄가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죄가 그들을 어리석은 자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매일의 양식이요 참 지혜가 되는 줄 믿습니다.

셋째로 우리의 삶 자체가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대한 영적인 전쟁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복음의 사명자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6.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어느 농장에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는데, 어느 날 사촌 형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형이 캐나다에서 석유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님에게 답장하기를 나도 석유사업에 동참케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석유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쓸 수 없다는 대답을 듣자, 그는 농사를 중단하고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석유공학을 공부한 후에, 다시 형에게 부탁을 드렸더니 그제야 형님은 와서 함께 일하자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흥분한 나머지 그 큰 농장을 달랑 833불에 팔고 캐나다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농장의 새 주인이 가축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살피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서 전문가를 불러 조사해보니, 그곳에는 큰 유전이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농장을 판 사람은 캐나다에서 형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사이에, 새 농장주인은 그 땅에 석유가 매장된 덕분에 갑자기 큰 부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죄로 인하여 심령이 어두워져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아니면, 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위기가 도리어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여러분이 당하는 지금의 이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축복에 이르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7.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16)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사람을 영원히 새롭게 만드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나같은 죄인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우리를,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복된 존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바울 처럼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자가 아니라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힌 그런 존재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아가는 전연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 버림받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은총을 기억하고 늘 감사하며,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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