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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죄(로마서2:1-8)
고영수 2021-10-30 추천 0 댓글 0 조회 751
[성경본문] 로마서2:1-8 개역개정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유대인의 죄(로마서2:1-8/2021.10.31.오전)

 

1. 오늘은 일본의 49회 중의원 선거 날입니다. 기시다 내각이 들어서자마자 치르는 선거입니다.

소선거구 289명의 자리를 놓고 어제까지 후보자로 등록된 자들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문제점 중에 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평온한 삶을 살아왔는데 여기에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킬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날이 갈수록 국가의 경쟁력을 잃어가고, 여기저기서 구멍이 뚫려 누수 현상이 심각한데도 모른 척 하거나 그 정도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입니다.

정말 일본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어제 일본경제신문의 사설에도 보니, 제목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일본은 언제까지 쇄국을 계속할 것인가?(日本はいつまで鎖国けるのか) 였습니다.

일본인들조차, 일본이 세계 정치경제 등에서 갈라파고스화 되는 것이 아니냐고 염려합니다.

위키 백과사전에 보니, 갈라파고스화(ガラパゴス)는 기술이나 서비스 등이 국제 표준에 맞추지 못하고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세계 시장으로부터 고립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기독교의 신앙적인 형태가 그야말로 갈라파고스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 조차도 주위나 세계의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마이웨이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현상을 스스로 자위하는 듯이 이 시대를 지키는 정통이고 보수신앙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퇴행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2천여 년 전, 유대인들이야말로 세상 변화되는 것을 역행이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특징, 특히 그들의 신앙적 특성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과거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삶에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해서 하나님 중심의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지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로마서 2장은 유대인들을 향해 집중적으로 경고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남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들여다볼 줄 모르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남을 판단하는 것이고,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방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은 선민이고 이방인들이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할례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는 이것은 유대인들을 결코 죄에서 구원해 주지 못하며, 그들을 새사람으로 선한 존재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도리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심판을 받고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일입니까?

본문 1절에서 판단이라는 단어는 의심하다, 헤아리다, 구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대인의 편견, 혹은 선입관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한국에서 손녀들이 와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작은 손녀가 막가파입니다.

2살 반쯤 지났는데 누구 말도 듣지 않고 제 고집을 반드시 관철시키는데, 그래도 제가 친하게 지내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침대방 한구석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데리고 나오려고 했더니 저를 무조건 몰아내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옷장 서랍이 조금 열려 있어서 호기심에 여기저기를 뒤지다가 발각나서 저를 쫓아내는가 했는데, 알고 보니 큰일을 보려고 몰래 숨어서 용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사람의 편견이라는 것이 무서운 일이고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3. 유대인은 스스로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편견은 도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줄로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 허물과 죄는 돌아보지 않고 이방인에 대한 비판만 날카로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6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 시는 것입니다.

선민이라고 유대인의 죄를 못 본 체하시거나, 율법을 소유하고 있으니 죄 문제에 대해서 면책의 특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각각 그 사람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 속에도 이방인들이 범하는 죄가 가득하고, 그들에게도 공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롬3:10에 가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 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그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7:1-2) 이라고 하시면서 형제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어떻게 너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의 판단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으신다(8:15-16) 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판단이나 비판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옛날 한국의 선거때 마다 나오는 구호 중에 하나가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자신이 관직에 앉아서 온갖 나쁜 짓과 실수를 많이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4. 이런 유대인의 교만한 마음에 대하여 본문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를 따라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떤 특권이나 유예가 없이 행한대로 심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의 생각에 대해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는 것입니다.

여기서 피한다는 말의 의미는, 피해서 숨을 곳이 없다는 것과, 도망을 가서 안전하게 거할 장소가 없다는 뜻입니다. 죄는 반드시 죄값을 불러옵니다.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늦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죄가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하나님이 그들이 회개하기를 오래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오래 기다리심과 자비하심을 짓밟고 멸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4절에, 너희들이 하나님의 인자와 인내를 멸시하느냐고 꾸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를 보시고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한지 보시고, 거기에 맞춰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5절에서 유대인들의 손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고 하였습니다.

 

5.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의 은총을 입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여도, 과거 유대인들이 교만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볼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한 것처럼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머리 위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에 '안자'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공자의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문간방에 마부를 위해서 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고, 마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느 날, 마부의 부인이 하는 말이, 당신을 보니 아무런 소망이 없어서 헤어져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부는 생활비가 모자라느냐, 다른 남자가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더는 당신하고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우리가 섬기는 안자 재상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인데, 그분의 말이나 몰고 다니는 당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이라고 매일 기고만장하고 거만하게 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보아도 당신은 미래가 없는 사람이니 더는 같이 살 이유가 없어서 집을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마부가 부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천자문도 모르는 까막눈이 재상의 권력만 믿고 교만하고 온갖 사람을 무시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밤마다 아내 앞에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옛날 모습과는 전연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유명한 책들을 다 읽고 학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학자처럼 학문의 실력이 뛰어났고, 사람도 확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임금이 안자 재상을 불러 귀한 인재로서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안자는 자기 집에서 마부 노릇을 했던 이 사람을 임금에게 천거하였고, 이 사람은 평생 임금을 위해 충성하면서 귀한 신하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도 우리의 신앙도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변화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생각과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유대인과, 남의 허물과 죄를 보면서 스스로의 죄를 볼 줄 모르는 이런 유대인을 닮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6. 같은 유대인이라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율법의 엄격함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지만,

예수님에게는 온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

15)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용서에 대하여 제자들이 질문하기를,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였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1-22) 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나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용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할 것은, 그 분의 온유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5:5) 고 하셨습니다.

교회 오래 다닌 것, 먼저 믿은 것, 직분 받은 것,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 자랑하지 맙시다.

이런 것 가지고 믿음의 식구들에게 상처 주거나 섭섭하게 만들지 맙시다.

우리 가운데 죄와 허물이 드러나면, 서로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그런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 사랑으로 용서를 받았고, 그 은혜를 입어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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