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로마서4:17-2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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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믿음이란 무엇인가(로마서4:17-25/2022.3.13.오전)
1.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가 지금의 서울에 수도를 옮기기로 하고 권중화와 정도전에게 궁터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지금의 청와대 앞쪽에 있는 경복궁 자리였다고 합니다.
경복궁은 1102년 고려의 숙종 임금 때에 처음으로 이곳에 이궁(離宮)을 짓게 되었고, 그 후에 경복궁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청와대 동쪽 끝에는 왕궁을 지키는 수비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문제는 왕궁의 후원에 해당하는 청와대 쪽으로 호랑이가 많이 나타나서 대궐을 침입하여 큰 피해를 주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에 일본이 1927년에 총독부의 청사를 지을 때, 풍수지리를 살펴서 조선의 왕궁에 흐르고 있는 용의 맥을 끊기 위해서 경복궁 뒤쪽에 총독의 관저를 지어서 그 기운을 눌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이 총독의 관저는 경무대로, 그 후에는 청와대로 바뀌면서 무려 1천여 년 동안 한 국가를 통치하는 중심이 되었는데, 지난 9일에 20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윤석렬 대통령 당선자는 이 청와대를 없애고 광화문 앞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건물의 일부를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청와대는 한국 대통령의 제왕적인 권위의 상징이 되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대통령이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정치를 하겠다는 의미로 청와대를 없애겠다고 국민에게 공약을 걸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것인데, 20대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실행에 옮겨지는 것 같습니다.
보안상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차기 대통령이 이것을 실천에 옮긴다고 하면, 지금까지 급한 김에 화장실에 들어갈 때의 마음하고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청와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국민들과 한 약속을 헌신짝 집어던지듯이 거짓말을 일삼던 그런 대통령들을 생각하면서, 그가 이번에 청와대를 없애겠다는 말을 듣고는 한 번 기대해 보면 어떨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천 년 동안 흘러내려 온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은 내용을 가지고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얻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 노인네 정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19절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그의 부인인 사라의 몸이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죽은 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보다 더 놀라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이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다른 사람이 아닌 아브라함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온갖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이며 축복이며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다시 말해서 믿음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물론이고, 오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그 믿음을 오늘 우리도 가졌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리켜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3. 결론부터 말하면, 본문 18절의 내용이 바로 아브라함과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것입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 인간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곳에서 답을 얻고 응답을 받고, 새 힘을 얻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주셨는데, 창세기 12장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는 말씀으로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15장, 17장에서 가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점점 더 늙어간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은 점점 왕성해지는데, 그 약속을 받은 당사자의 육체는 점점 힘을 잃고 쪼그라들어 연약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너를 크게 번성케 하여,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며,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99세였고, 사라는 90세였으니, 솔직히 소망이 전연 없는 늙은 부부였습니다.
과연 이런 현실 속에서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때를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많이 겪는 어려움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게 주어진 현실은 소망이 없고 답도 없고, 생각할수록 내 삶은 비참한데,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하게 내게 새 힘이 되고 그 말씀을 가까이하면 힘이 나고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삶의 현실과 우리가 가진 믿음의 세계 사이에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깊고도 캄캄한 건너기 어려운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 인간의 약점은, 내 생각과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의심과 두려움에 빠지기 마련이고, 이때부터 인생의 진짜 위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불쌍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애굽에 보어 바로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굽에 임한 10가지 재앙에서 살아남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늘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불신앙에 빠짐으로 늘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이 없으면 생각은 계속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판단을 이끌어내고, 그래서 인생은 더 깊은 고통과 멸망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를 방황하다가 출애굽한 세대는 결국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믿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평가하거나 저울질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약속하셨다는 이 사실 하나로 아브라함은 흔들지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처해 있었던 절망적인 상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9절에 보니, 자신의 몸과 사라의 몸이 출생에 관해서는 사망 선고를 받은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을 굳게 붙들었다는 뜻입니다. 내 몸과 현실은 가능성이 제로지만, 생명의 주인이시고 창조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니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5. 인생이란 삶의 고통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무엇하시느냐고 할 것입니다.
인생의 고통과 문제는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고통과 저주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몰아넣은 것이지 하나님이 방관하시거나 우리를 괴롭히시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죄 가운데 빠져 고통하는 우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고, 그 아들에게는 죽음을 우리에게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지, 결코 우리가 율법을 지켜 얻은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양보하기도 하고 참기도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와 같은 시련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창22장에 보니,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번을 양보해서 생각해도, 이것은 하나님이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어렵게 아들을 주시고는 이제 안심할만하니 느닷없이 그 아들을 도로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짐승을 잡듯이 제 자식을 그렇게 잡아서 바치라고 하니 누가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람들에게 침묵하고 조용히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 나무를 벌려 놓고 그 위에서 아들을 칼로 잡아 죽이려했습니다.
그냥 놔두면 분명히 제 자식을 죽일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창22:12절에 보면, 하나님이 급히 천사를 보내어 아브라함의 그런 행위를 막았고, 수풀에 뿔이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숫양 한 마리를 아들 대신에 제물로 드리게 하였습니다.
6.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가면, 그곳에서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생의 모든 위기는 한결같이 우리 인생을 끝장내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늘 새로운 돌파구가 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며 새로운 힘을 얻는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도,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속이거나, 최면을 걸거나, 가상적인 것으로 만족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없던 것이라도 믿음의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버리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는 실존이라는 것, 즉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선악에 대한 개념을 뒤로한 채 여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래서 악한 일인 줄 알면서도 제 양심을 팔기도 하고, 고통하는 사람을 더욱 고통케 만들고, 거짓말로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며, 우리를 위해서라면 더 놀라운 것도 만들어 내시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므로 내 현실, 내 형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며, 어떤 약속을 하셨으며, 나는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죽은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던 것이고, 이제 와서 아들을 내놓으라는 말씀에도 의심도 계산도 없이 그렇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존재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다만 우리는 육체의 한계성으로 인해서 그것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여기에 대한 반응으로 바랄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졌" 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21절에 보니,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 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주어진 상황과 육체의 연약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시간이 가면서 확신으로 변하고, 그 확신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그 바라봄이 마침내 언약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내 삶 한 가운데서 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러한 믿음에 관해 증거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 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을 포함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이것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이나, 손에 잡히는 것이나, 계산이 맞아 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죽은 것 같음을 알면서도 연약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의심없이 믿고 기다리고 따라가는 이것이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온전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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