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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용서할 수 있습니까?(누가복음23:33-43)
고영수 2022-04-02 추천 0 댓글 0 조회 857
[성경본문] 누가복음23:33-43 개역개정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당신은 용서할 수 있습니까?(누가복음23:33-43/2022.4.3.오전)

 

1. 이씨조선 시대에는 딸을 시집 보낼 때 가마에 태워서 보내는데, 가마에 오르기 전에 신부의 눈에는 꿀을 발라 눈을 뜨지 못하게 하고, 귀에는 솜을 넣어서 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고, 입에는 어금니에 대추 씨를 물려서 웃거나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일생에 가장 엄숙한 예식에서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신부의 감정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시집살이를 하려면 벙어리 삼 년, 장님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 입을 꾹 다물고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야 비로소 칭찬을 듣는 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옛날 사람들은 참 인내심이 강했구나, 이런 생각보다는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그런 남편 한 사람을 믿고 시집와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을까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멀쩡한 여인에게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언론 통제는 물론이고, 연약한 여인을 향한 제도적인 억압과 학대와 멸시가 당연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우리 어머니들은 평생을 인내하면서 자녀들을 키웠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가정을 지켰고,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녀들과 그 후손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그 어떤 것 하나도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장래가 있을 수 없으며, 그런 희생을 치르지 아니하고는 성장도 영광도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2. 4월은 만물이 꽃을 피우고 물을 머금어서 온 세상을 아름답고 싱싱하게 만들어 가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 사람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래서 우리 대신에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셨고, 이로 인하여 우리는 사죄의 은총을 얻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십자가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인데, 웬일인지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그 자리에서 과연 무슨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구속의 은혜와 영원한 축복을 깨달아 그에게 찬양과 감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3. 제일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가 올린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34절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냥 매달려 계신 것이 아니라 양손과 양 발에 굵은 대못을 박았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등과 온몸에는 이미 무수한 채찍 자국이 있었고, 그 모든 상처로부터 피가 흘러내리면서 그분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보신 것이 무엇입니까?

죄가 없는 예수님에게 억지로 죄목을 뒤집어씌워 불법 재판으로 사형을 받게 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몸에 못을 박은 로마 군병들, 그리고 몰려든 구경꾼들과 함께 못 박힌 강도들까지 예수님을 향해 조롱과 멸시를 퍼붓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생각을 바꾸면 상황이 달라지듯이,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알았더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무지, 어리석음이 이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으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4.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용서와 화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용서할 줄 알고 원수하고도 화해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감정과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에 변화가 온 것 뿐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만 보면 심판을 받아야 하고 때로는 그들의 행동에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도 나처럼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저 사람도 하나님 자녀가 누리를 사죄의 은총과 축복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악하게 반응하고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소녀가 살던 곳에서 이사하면서 다니던 중학교도 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시작된 이지매(왕따)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강변 숲에서 배를 5군데 찔러 자살을 시도했고, 발견되어 몇 번의 수술을 거쳐 겨우 생명을 건졌습니다. 학교에 돌아가니 이지매는 이전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행패를 부리는 동급생들이 인간이라면 나는 그 인간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하고 학교를 자퇴하고 매일 술·담배를 하면서 무면허로 폭주 족에 가담했고, 16살에 폭력배와 결혼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21살에 이혼을 하고 호스티스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오랜 친구 분이 찾아오셨고, 그분이 하는 말이, 너희 인생이 망가진 것은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나 지금 너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생을 새롭게 살기로 결심하고 그분의 도움을 받아 공인중계사 시험에 도전했지만,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 했고, 술·담배로 망가진 머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인중계사에 합격 한 후에, 법무사 시험에도 도전하였고, 긴끼대학 법대에 들어가서 29살에 사법고시를 패스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오오히라 미쯔요(大平光代)로 그녀의 책, 「だから、あなたも生き抜いて」 (그러니까 너도 살아남아)는 260만부가 팔렸습니다. 

오사카시의 부시장을 그만둔 후에 지금은 학대받은 아동들과 장애자 및 성범죄에 관련해 변호사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생이라도 한 번 생각을 바꾸니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온 것입니다.

 

5. 전도가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도의 비결은 용서하고 화해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말씀에 힘입어 내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내가 아무리 옳아도 우리를 망가뜨리고 지옥 같은 생활로 만들지만, 용서는 먼저 내 마음에 천국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의 천국만 바라보지 말고 지금 내 안에 용서를 통해서 천국을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위해 용서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 고통이 크고, 감정이 폭발한다고 하여도 한 사람의 생명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이 기도는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병들은 그분의 옷을 가지려고 서로 제비를 뽑았고, 또한 예수님을 가짜 왕처럼 만들어 그를 때리면서 희롱하였고, 여기에 종교지도자들과 관리들고 백성들, 그리고 강도까지 가담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모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은 잘해도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부끄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고 하셨습니다.

 

6.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용서의 기도였는데, 그 내용에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 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면 망할 수밖에 없고, 깨닫지 못하면 고통스럽습니다. 무지하면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그렇게 조롱했을까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실제는 너무 무능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자신은 물론이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관원들과 병사들과 강도처럼, 그리고 구경하는 백성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같은 죄인이었지만, 이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줄 믿습니다.  

 

7.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죄의 기도를 올리던 그 예수님의 기도는 한 편 강도를 구원하고 말았습니다.

39절에 보니, 다른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 말하기를, 네가 참 그리스도면 너와 우리를 한 번 구원해 보라고 조롱할 때, 다른 한편의 강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 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한 강도는 자신이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제 인생이 이렇게 되고 말았는지 깨닫는 것이 전연 없었지만, 그러나 한편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인생, 부끄러운 인생, 연약한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이 무엇입니까?

42절에 보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였고,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의 기도가 다른 한 편의 강도처럼 자신의 죄와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인생을 깨닫지도 못하고 멸망할 뻔했던 그런 불쌍한 죄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가 오늘부터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결과를 가지오는지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죄의 능력과 기도 응답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라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놀라운 구원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도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8.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사도 베드로가 고백한 대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입니다.

그는 날 용서하시는 대가로 사망을 향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날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죄인을 용서하시는 그 사랑을 생각하며, 원수도 사랑하고 미운 사람도 용서하고, 믿음의 형제들끼리 서로 양보하고 위로해 주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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