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로마서9:1-5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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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제공: 대한성서공회
불신앙의 비극(로마서9:1-5/2022.9.18.오전)
1. 1995년 3월20일, 동경 지하철에서 사린 독극물 살포로 14명이 죽고, 5,800명 이상이 중독되는 일본열도를 흔드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주범은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와 그 추종자들로 일본을 강탈할 목적으로 일으킨 범죄였는데, 내부적으로는 일본 정부를 통치할 수 있는 내각 조직까지 다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들은 살인과 테러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고, 그래서 그곳의 신자들은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일본에서 살면서도 일본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이단적인 종교집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방자치체는 그들의 전입신고를 받아주지 않았고,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의 자녀들이지만, 어느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입학을 거부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일본사회의 암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1년쯤 전에, 요시모또 흥업(吉本興業)의 소속으로 코미디언 활동을 하던 연예인, 시마다 신스케(島田紳助)와 몇몇의 동료들은 알게 모르게 폭력단과 연류가 되면서 눈물을 머금고 연예계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연을 부탁받고 갔다가 억울하게 연루된 사람들이었지만, 힘없는 그들은 변명의 여지도 없이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7월 8일, 국회의원 지원 연설 중이던 아베신조 전 수상이 반사회적인 종교단체인 구 통일교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의 손에 저격당해 죽었고, 그때부터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언론에 뭇매를 맞으면서 그들의 실태가 차례차례 폭로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베 전 수상은 물론이고, 정권을 잡은 여당인 자민당의 국회의원들 중에 179명 이상이 이같은 구 통일교회와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 자체 조사에서 드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국회의원들과 자민당의 대응입니다.
앞으로는 구 통일교회와는 일절 관계를 끊겠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반사회적인 종교조직과 연류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국회에 진출한 사람들이지만, 아무도 이런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옴진리교 신자의 자녀들까지 일본인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그런 자격까지 박탈하면서, 정작 정치가들은 그야말로 코미디언들보다도 못한 그런 양심과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는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2. 제가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제일 많이 혼나고 그것 때문에 다음 날 학교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죽도록 매 맞은 행위는 거짓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전연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물 마시듯이 하는 것과 온갖 대형사건을 일으키고도 책임질 줄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 정치가들은 금방 탄로가 날 일을 가지고도 무조건 잡아떼고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시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딤전4:2절의 말씀으로, 곧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는 이 구절입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되면, 그것이 딱딱해져서 감각을 잃은 상태가 되고, 그래서 선악에 대한 분별이나 진리와 거짓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기 때문에, 그래서 한 번 거짓말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거짓말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거짓말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세상이기 때문에, 성도는 항상 진리를 말하고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거짓말은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고 강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롬 8장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이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런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에게는 그렇게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또 다른 귀한 관계를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3절에 보니, 자신의 형제, 골육의 친척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3. 이 세상에는 죄로 말미암아 많은 비극이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지만, 비극 하면 머리에 떠 오르는 것이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햄릿의 내용은, 몰래 햄릿의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위에 삼촌이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였고, 이 사실을 알고 복수하려던 햄릿까지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 햄릿을 포함해 모두가 죽는 슬픈 내용입니다.
리어왕의 내용은, 딸 셋을 가진 왕이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왕좌를 물려주려 하는데, 셋째 딸은 영악한 언니들에 비해서 표현력이 부족하다 보니, 왕의 노여움을 받아 지참금도 없이 멀리 시집을 보내 버리고, 남은 두 딸에게 나라를 반씩 나누어 줍니다.
더 이상 부친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안 두 딸은 점점 아버지를 차갑게 대하고, 화가난 부친은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방랑하며 살던 중, 소식을 들은 셋째 딸이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를 구하려 오지만, 질투심에 눈 먼 첫째딸이 둘째 동생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고, 셋째 딸도 아버지를 구하려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살해 당하였고, 부친은 딸 중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했던 셋째의 시신을 부둥켜 않고 절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비극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요1:10-11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 다는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에 저주와 죽음의 고통에 빠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이 땅에 보내셨지만,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기는커녕 미워하고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니, 그래서 사도바울의 고민은, 동족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그 아들을 죽이고 그를 믿는 자들까지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일이라면 내가 대신하여 저주받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부터 끊어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4. 문제는 우리가 이 사도바울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가족 구원을 원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 같은 마음을 품었더라면 벌써 가정 복음화는 이루어졌을 것이고, 일본의 수많은 영혼들도 구원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만큼 자기 동족들에게 시달림과 죽음의 위협을 당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동족이요 혈육인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애간장 다 태우며 복음을 전하고 기도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이런 바울을 박해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 4-5절의 내용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온 세상을 캄캄하게 만들었으니,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동족 이스라엘을 볼 때 마다 생각나는 것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는 이 말씀입니다.
5. 우리 가운데 믿지 않는 남편들이 신앙생활에 열심 내는 부인들을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 아내는 어리석어서 종교에 빠져 있고, 나는 그런 아내보다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내가 권하는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 시대의 이스라엘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힘 없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어리석고 불쌍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일을 그만하라고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그렇게 지독한 율법주의자인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 아니라,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는 불쌍한 인간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고 영접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너무 간단하고 놀라운 방법이라 자꾸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너무 간단하니 그래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받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영원히 멸망해도 나는 그렇게 할 것이라 3절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정의 식구들을 위해서 친척과 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6. 일본 선교사들의 제일 큰 고민은 일본 전도가 너무 어렵고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에 비하여 선교의 열매가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에게 더 큰 고민이 있는데 나에게는 사도바울과 같은 그런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한국 사람들은 이웃나라 일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가?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왜 우리는 그들에게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일 간의 역사적인 문제나 문화적인 차이, 혹은 차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선교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왔지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 동족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왜 우리는 그같은 마음을 품을 수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누구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참된 목적을 잃고 인생의 패배자가 될 뿐입니다.
이것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살고 이 교회에 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미리 계획하신 일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위해 쓰임받을 수 있는 비결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7. 벧전2:9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택함받은 존재요, 세상을 향하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연약한 우리를 어째서 무엇을 위해 이렇게 귀한 존재로 삼아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후반절에 보니,"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함" 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하나님이 베푸신 온갖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누리면서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은 것처럼, 오늘 우리의 비극은, 내가 누구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내 욕심을 따라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고 복된 일이고 행복한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는 동족을 향한 불붙는 사도바울의 심정으로 가족과 친척과 이웃에게, 그리고 일본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면, 불신앙의 비극은 믿음의 능력으로 바뀌고, 양심의 고통은 구원의 열매로 인한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고, 이것이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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