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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로마서9:19-24)
고영수 2022-10-01 추천 0 댓글 0 조회 743
[성경본문] 로마서9:19-24 개역개정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의 주권(로마서9:19-24/2022.10.2.오전)

 

1. 2003년에 출판된 요로다께시(養老孟司)의 바보의 벽(バカの壁)이라는 책을 보면, 의과대학의 약학부 학생들에게 어느 부부의 임심에서 출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그 소감을 물었습니다.

여학생들은 좋은 공부가 되었고, 또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남학생들은 평소에 다 알고 있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같은 학과의 학생들이지만, 남녀 간의 반응에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정보를 대하는 자세라고 했습니다.

남자들은 출산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정보를 얻으려 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것을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의 영상을 통해서 남학생들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여자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거쳐야 할 과정이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면서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말해 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것을 가리켜 바보의 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다 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복음을 한 번 설명해 보라고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그래서 전도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평생을 교회 다녀도 구원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 이미 웬만한 것은 다 알고 있으니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는 우리의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고, 새 힘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더욱더 알고 체험함으로 구원의 확신과 삶의 참 기쁨을 누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2.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긍휼과 진노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그분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제일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고집과 생각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14:8)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빌1:20절 하반에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와 능력과 영원한 미래에 대한 확신뿐 아니라, 하나님이 왜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사명자로 불러 주셨는지 말씀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심심해서 우리를 만드셨거나, 어떻게 하다보니 실수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미국의 스티브잡스가 애플에서 아이폰을 출시할 때가 2007년 6월 29일이었습니다.

당시 휴대폰 시장은 노키아가 세계 50%의 시장을 장악하고, 그 뒤를 모토로라, 삼성, 소니 같은 기업들이 뒤쫓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장 한 가운데를 뚫고 들어온 애플의 아이폰은 전화기 기능 이외에 인터넷과 음악을 담는 아이포트를 함께 넣어서 출시 10년 만에 13억대를 판매하면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그 덕분에 잘 나가던 컴퓨터 사업이나 디지털 카메라는 물론이고 통신산업까지 다 무너지거나 아이폰에게 종속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없이는 누구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구촌 사람들의 삶의 패턴을 전화기 한 대가 다 바꿔버린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아이폰을 만드는 애플이 추구하는 것은 가격이 아니라 애플의 핵심 철학입니다.

그 핵심철학이 어디에 담겨 있느냐하면, 전화기 속에 깔려 있는 소프트 웨어에 있습니다.

이제는 인공지능을 통해서 자동차 자율주행이며, 세계 최고의 첨단 산업이 다 애플의 아이폰과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제 곧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이런 프로그램이 깔려 있는 휴대폰과 같은 하드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오류 부분을 수정하거나, 그것이 안되면 폐기 처분하고 새로 만듭니다.

그런데 애플의 아이폰도 사람이 만들다 보니 계속 불량품이 나오고, 이런 것을 고치기 위해서 애플은 일방적으로 프로그램을 송신해서 문제점을 고쳐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면 다른 회사 물건으로 바꾸면 되지만, 대부분 그냥 사용합니다.

  

4. 오늘 본문을 보면, 인간에 대하여 뭔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선포가 보여집니다.

지성과 이성을 겸비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21절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에서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그의 손에 들려진 진흙이라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이 반죽한 진흙을 가져다가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과 온 우주와 우리 인생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뜻을 따라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릇이 왜 나를 이따위로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열심히 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생의 본질적인 연약함과 한계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을 내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서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라는 하였는데, 우리 인생은 누구며 무엇입니까?

약14:14절에 보면, 우리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 라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벧전1:24) 진다고 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인생, 따져 보면 흙 먼지로 만들어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물론이고, 우리 인생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려면 내 자신의 가치, 인생의 존재가치가 어떤 것인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5. 본문 20절에 보니,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아니었다면, 찬송을 부를 자격도 없고, 기도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도 구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당하고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내가 누구며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절 중간에서 "지음을 받은 물건"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프라스마(Plasma), 헬라어로는 프라스티코스(plastikos)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틀에 넣어 반든 것, 조립된 것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플라스틱(plastic)이라는 단어나 나왔습니다. 

플라스틱 쪼가리 같은 인생이 하나님을 향해 반박이나 비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공격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우리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판단하고 우리의 신앙의 가치를 저울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된다고,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말씀대로 살지 않고 위선적인 삶을 산다면,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며, 또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6.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우리 인생도 남들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비관적인 생각이나,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나, 반대로 지나치게 자만하거나 호언장담이나 맹세하는 것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말하고 결정하면 반드시 부끄러움과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출14장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기쁨도 잠시였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았고, 뒤에는 애굽 군대의 추격이 있었고, 양옆에는 병풍처럼 가로막는 산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독안에 든 쥐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공격하면서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여 다 죽게 만드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그런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출14:3절에,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고 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나 바로 왕이나 생각이 같습니다.

문제는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과 판단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악한 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여기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21세기에 기독교가 위기를 만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이 문제이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7. 이 때 하나님의 종인 기도의 사람 모세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출14:13절에,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고 하였습니다.

세상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은 갇혔다고 생각하고 다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세는 똑같은 상황에서도 주어진 환경을 보지 않고,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만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환란의 시대에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망하는 대신에 기도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손으로 만드신 질그릇과 같은 연약하고 죄많은 인생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판단을 받으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나같이 연약한 인생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보호를 받고 은혜를 입는 것에 감사해야 하고 찬양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복된 시간에 왜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해야 합니까?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영원히 멸망하려고 환장을 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내 소원 성취하고 잘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이폰을 만든 애플사에게도 핵심 철학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도 핵심철학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롬9:5에 보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시라" 하였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의 손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이 만드신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기에 맞춰서 우리는 평생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내 삶 속에서 높여 드림이 마땅합니다.

둘째는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하였으니, 

만물의 찌꺼기보다 못한 나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고 영광스럽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온 세상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나를 나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내 생각과 고집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능력이 우리의 삶에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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