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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자녀가 되었는가?(로마서9:25-33)
고영수 2022-10-08 추천 0 댓글 0 조회 792
[성경본문] 로마서9:25-33 개역개정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자녀가 되었는가?(로마서9:25-33/2022.10.9.오전)

 

1. 마쯔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하면, 파나소닉을 창업하고, 일본에서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또한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을 세워 일본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일에 힘을 쏟아, 지금의 정치, 경제, 교육 분야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 밑에서 기술자로 일하다가 나중에 파나소닉 4대 회장에 취임했던 다니이 아끼오(谷井昭雄), 처음으로 마쯔시타 고노스케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네 기술자인가? 라고 물으면서 우리 회사가 품질관리와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품질관리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질관리(人質管理)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회사는 물건을 만들기 이전에 사람을 먼저 만드는 회사라는 것을 이 젊은 기술자에게 깨우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때 회장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이런 의미로 말씀하셨구나 하고,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서 실감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여러 가지로 실패를 할 때마다 그 말이 찡하고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는 뜬금없이, 자네! 제품을 껴안고 자 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너무 의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있을 때, 자네가 제품을 껴안고 자 보면, 그 물건이 자네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자세를 가지고 제품을 개발한다면, 여기는 좀 더 이렇게 해야 했는데 하는 것을 마치 제품이 문제점을 알려 주는 것처럼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었다고 합니다.

그는 회장님의 이 두 마디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면서 경영자의 길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사람이 있음으로 제대로 된 좋은 물건도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는 법이나 제도도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어떻습니까?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할 정도로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을 버리고, 내 백성도 아니고 사랑하지도 않는 이방인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만 율법을 주셨다는 특권의식이 빠져서 교만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노력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말았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우리 교회에 교단의 고참 선배 목사님이 부흥 강사로 오셨는데, 소천하신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본인은 말기 암 환자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 치료를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처럼 암이 몸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거나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암은 그대로 있는데, 활동이 완전히 멈춘 상태로 치료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후배 목사님들과 나누는 담소 가운데 강조하시는 말이 있었습니다.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때는 이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자랑하고 힘쓰고 수고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세월에 이르고 보니, 늘 제 생각을 떠나지 않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세월 이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세월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이름을 남기고,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그런 자격도 힘도 능력도 없는, 정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짓밟고, 자신들의 의를 하나님의 공의보다, 하나님의 긍휼보다 더 앞세우던 이스라엘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리에서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사도바울은 32절에서,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고 하면서, 33절에서는 이사야8:14절을 인용하여,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걸림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으며, 시온은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유대인들은 이런 잘못된 행위를 도리어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 결과는 마23:34-36절에 기록된 것처럼,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프스는 이 사건을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A.D 70년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로마가 보낸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때,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포위당하자 기근과 역병에 자기 자녀를 삶아 먹는 일이 일어났고, 성 안팎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기드론 시냇가는 사람들의 피로 흘러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유대인이 팔레스틴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나라를 잃고 전 세계를 떠도는 디아스포라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23:34-3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 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랴가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는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4. 하나님의 진노는 당장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 보라! 선지자들의 말이 다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자랑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의가 하나님의 진노를 막은 것이 아니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고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도적처럼 갑자기 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하나님의 진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살면, 그 분의 심판과 종말은 도적처럼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습니다. 도리어 지혜자와 전도자와 선지자들의 말을 단순한 협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아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노아의 때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나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도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말로 여길 때, 홍수는 노아의 말대로 일어났고, 이스라엘의 멸망은 선지자들의 외침대로 현실이 되었고, 오늘도 우리는 대 혼란과 전갈로 찌르는 듯한 고통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그런 무너짐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된 점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전도자의 경고를 이성과 지성에 맞지 않는 허황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손에 무너졌고,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5. 하나님의 은혜를 짓밟고, 자신들의 의를 하나님의 공의보다, 하나님의 긍휼보다 더 앞세우던 이스라엘의 두 번째 결과는 무엇입니까?

25절과 30절의 말씀대로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25)신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갑자기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호세아서에서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무시하고 자기 의로움에 빠져 교만한 이스라엘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비수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빠져 소망 없이 죽어가던 우리에게는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는 이 말씀은 복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백성이 된 것을 가리켜 30절에서 믿음에서 난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도 효력이 없고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 때문에 죽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33절의, "그를 믿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방인이라도 그 어떤 죄인이라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이것입니다. 그의 보배로운 피로 죄를 씻으면 새 사람이 되며 영생을 얻는다는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유일하게 구원에 이르는 길인 줄 믿습니다.

 

6.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의 자기 공로를 의지하는 교만한 마음과 아브라함의 씨라는 특권 의식이 그들을 구원에서 멀어지게 만든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한 번 구원받으면 취소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는 생각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마음과 어리석은 생각에서 이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유대인들처럼 될까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들 마다 섬기라고 주신 은사와 직분을 계급장처럼 자랑하고, 교회에 대한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교만한 마음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좋은 의견 없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가라지가 많다고 하시면서, 가라지를 뽑으려다 곡식까지 다칠까 봐 차라리 추수 때까지 함께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29-30).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유대인이 다 멸망해도 그들 가운데는 남은 자가 있으며, 29절에서는 그 씨, 곧 남은 자들을 다시 말하고 있는데,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원래는 12지파로 구성되었다가 남북 왕국으로 나뉘면서 10지파는 북왕국 이스라엘로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2 지파만 남 왕국 유대 나라로 언약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비율로 따져보니 16.6%였습니다.

 

7. 교회 안에 남아있다고 이 사람들이 다 영적으로 남은 자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공로가 있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내 능력이나 자랑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받고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의 감격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일방적인 은혜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서두에서 사도바울의 말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16) 임을 깨닫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내가 받은 구원에는 감사하고 기뻐하며, 내가 받은 이 복음은 이웃에게도 전하여 많은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일에 더욱 힘쓰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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