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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마음(신명기25:1-10)
고영수 2023-06-24 추천 0 댓글 0 조회 295
[성경본문] 신명기25:1-10 개역개정

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그리스도인의 마음(신명기25:1-10/2023.6.25.오전)

 

1.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지만, 인생은 늘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하지 않는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수시로 찾아오는 많은 문제로 염려와 근심을 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환경이 좋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는 환경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고, 내 생각의 방향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교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편안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마음에는 감사가 있으며, 세상은 늘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내 마음이 변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똑같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감정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만일에 시간에 쫓기며 그것 때문에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자연이 주는 행복감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꽃을 보고 감탄하고 기뻐하는 사람을 보고 한가한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꽃도 싫고 그 꽃을 보고 즐기는 사람까지도 싫어지기 마련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고 감사가 넘치는 것은, 주어진 환경과 남다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2. 송나라의 학자인 주신중(朱新仲)이 인생의 오계(五計)를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먹고 살기 위한 직업에 관한 것(生計), 건강을 관리하는 것(身計), 가정을 돌보는 것(家計), 노후를 관리하는 것(老計), 그리고 사후(死計)에 대한 것입니다.

이 오계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선비들과 상류사회에 영향을 끼쳐 오멸(五滅) 사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노후에 어떻게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재물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滅財), 타인과의 원한을 푸는 것(滅怨), 정신적인 부채를 청산하는 것(滅債), 정든 사람과 정든 물건을 정리하는 것(滅精), 그리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滅亡)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대하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내가 평소에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며, 또 때가 오면 그런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노후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게 되면 임종에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것인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잘 맺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3. 본문 1절의 말씀은 정말 요즘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 이라 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가장 간단하고 쉬운 일 같으면서도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이렇게 쉽고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103조에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되어 있지만, 판검사의 양심이 실종됨으로 국가의 법이 종이호랑이가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성경에 재판관은 뇌물을 받지 말고, 가난하다고 불리하게 재판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아무리 중해도 말 잘하는 변호사를 선임하면 유죄도 무죄로 바뀌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잠17:15절에,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 다 하였으니, 판결을 뒤집고 왜곡하는 그들이 장차 받을 심판과 환란과 부끄러움은 영원할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존감을 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양심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선악을 묻지도 않고 제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공정과 정의와 도덕으로 세워왔던 이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고 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의 착한 행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고대사회에서는 죄인을 가두어 두는 징역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벌금을 물리던가 아니면 태형으로 다스렸습니다. 문제는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이나 태형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이스라엘 안에서는 아무리 중한 죄인이라도 40대 이상의 매를 때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유는 본문 3절에,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매를 지나치게 많이 때리면 죄인이 죽거나 불구자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후11:24절에 보면, 사도바울도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40에 하나 감한 39의 숫자는 율법에 금지된 40대 이상의 매를, 잘못 세어서 40대를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중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긍휼을 베풀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죗값을 치른 후에는 차별 없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에게도 기회를 주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남에게 한 대 맞으면 수십 배 수백 배로 갚아 주는데, 그것도 분노와 광기를 실어서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용서와 자비로움입니다. 이것은 중한 죄인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6:14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 리라 하면서, 6: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3:2)을 말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을 왜 때리고 가둡니까? 잘못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새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리고 가둔 결과 새사람이 못되고 더 악한 자가 된다면, 이것은 제도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고쳐야 합니다.

 

5. 계속해서 본문 4절을 보면,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고 하였는데, 이것은 소가 주인과 함께 추수한 곡식을 타작하는 과정에서 소가 자꾸 이것저것 주워 먹게 되면, 주인으로서는 일의 속도가 늦어지고 곡식도 축내기 때문에 소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인데, 적어도 이렇게 일하고 있는 소에게는 그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딤전5:18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전도자는 그 일한 삯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뜻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척교회의 목회자나 선교사들 중에 많은 분이 교회나 선교 활동을 통해서 제대로 된 생활비를 받지 못해서 많이 고생하고 자녀 교육 문제로 많이 고민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차적으로는 목회자나 선교사들은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대리로 하고 있어서 당연히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믿어야 하고, 그렇하면 의식주를 가지고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차적으로는 교회 규모가 작아서 재정이 어려워 목회자의 생계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온 교우가 사역자의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교회 안팎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고 잘못이 없는 것은, 십일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고 이 법을 통해서 목회자나 선교자가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6. 마지막으로 본문 5절의 내용은, 계대법(繼代法), 혹은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고 불리는 내용입니다. 같이 사는 형제 중에 형이 결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는 가운데 죽게 되면, 그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서 형 대신에 기업을 이어갈 자녀를 낳아 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부여, 고구려, 청나라 등에서도 있었고, 최근에는 일본이 패전 후에 홀로된 형수나 조카를 위해 형사취수를 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1977년에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간행된 와다나베 기요시(渡辺清)의 산산조각난 신(かれた-ある復員兵手記)이라는 소설에도 이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형의 전사 소식을 들은 가족들에 의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일화가 나오는데, 그렇게 부부관계를 맺고 부인은 시동생의 아이를 낳고 다음 아이까지 임신하였는데, 어느 날, 전사한 줄 알았던 형이 집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임신한 아내의 배를 보고 미쳐 날뛰다가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형은 울분을 토하며 부모까지 뿌리치고 가출해 버린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현대사회는 그렇다 해도, 고대사회에서는 그때 해당하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과부는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죽은 생명과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책임지도록 하고, 형수 사이에서 난 첫 아이를 형의 상속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창38장에 보면, 유다에게 아들들이 있는데, 첫 아들이 결혼해서 자식이 없이 죽자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인 다말에게 들어가도록 했는데, 오난은 그것을 거절함으로 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 오난처럼 형사취수제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제도를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있지만, 중대한 책임을 회피한 자로 간주되어 죽을 때 까지 부끄러운 자로 기억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 이라 했습니다.

 

7.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일정한 법을 만들어 그 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을 베푸시고, 그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벌을 주셨는데, 이렇게 벌을 내리시는 목적은 미움의 응징이 아니라, 그 잘못된 생각과 마음을 고쳐서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법정을 보면, 죄를 심판하기 전에 사람을 능멸하고 부끄럽게 만들고, 죽도록 고통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생각은 모든 사람이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축복을 누리며 즐겁게 사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 자신의 기쁨입니다.

재판관에게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셨으니, 뇌물을 물리치고 공정하게 재판을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은 당연히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죄인에게 매를 치는 것은 능멸이나 응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인의 마음을 바꾸고 새사람으로 만들어 그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복하고 복되게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까지 영원토록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시편34:9-10절에,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는 말씀처럼 그 말씀이 내 마음을 행복의 보물창고로 만들 것이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욕심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서, 나의 행복이 이웃의 기쁨이 되고, 나의 감사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고, 나의 기도가 하늘 문을 열어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래서 늘 행복한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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